한국 사회에서 동물의 위치는 사안에 따라 다르다. 반려동물 가구에서 동물의 위치는 ‘가족’이지만 법에서는 인간이 소유한 재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동물의 지위가 사회적 합의를 얻지 못해 발생하는 갈등은 크다.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 논쟁이 대표적이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의 진료 기록을 보고 싶다는 보호자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수의학계의 입장이 팽팽하다. <뉴스포스트>는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논쟁의 합의점을 찾아보았다. -편집자 주-

(사진=뉴스포스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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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 논란과 관련해 현재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현행 수의사법에 따르면 동물병원은 일반 병원과는 달리 진료기록부를 발급할 의무가 없다. 보호자 요구 시 진료기록부를 발급해주는 동물병원도 있지만,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수의사가 거부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료사고 등 동물병원과 분쟁을 겪는 사례는 해마다 300건이 발생한다는 통계가 있다. 여기서 보호자들은 사실상 절대적 약자에 위치한다. 동물 진료 행위가 평범한 시민들이 접하기 어려운 매우 전문적인 분야인 데다 진료기록부까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의 맹점은 고스란히 소비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하지만 수의계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이유다. 대한수의사회 관계자는 지난 8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 동물의약품 유통체계 개선 ▲ 동물 진료체계 표준화 ▲ 동물권 인식 향상 등이 이뤄져야 발급 의무화가 시행돼도 혼란이 적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동물진료의 ‘공공성’을 인정하는 절차도 추가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열악한 현행 수의사법으로 반려동물 보호자는 물론 일선 수의사들까지 피해를 보는 상황. 그렇다면 국내보다 반려동물 문화가 정착된 해외 선진국의 상황은 어떠할까.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사진=픽사베이)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사진=픽사베이)

동물권 선진국의 선택은?

미국 대부분 주는 진료기록부 제공이 의무화됐다. 캘리포니아 주는 보호자가 치료 동물의 의료 기록을 요구할 시 요약본을 제공해야 한다. 뉴욕 주의 경우에도 수의사는 보호자의 요청에 따라 일정 기간 내에 기록을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같이 미국은 진료기록부의 투명한 공개로 수의사들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따져봐야 할 점은 미국과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은 명실상부 반려동물 문화 선진국이다. 2019년 지인배 동국대학교 식품산업관리학과 교수가 발표한 ‘미국의 반려동물 산업 현황’에 따르면 미국은 전 세계 최초 단일 국가의 반려동물 산업 규모가 80조 원을 넘어섰다. 주 마다 반려동물 보호법이 제정된 것은 물론 보호자에 대한 각종 규제가 갖춰져 있다. 국내와는 다르게 진료기록 의무화로 혼란이 야기되는 환경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선진국에서는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는 물론, 동물병원 의료사고 피해자들을 위한 피해보상 법안까지 제정돼 있다. 박주연 동물권연구단체 PNR 공동대표가 2017년 발표한 ‘반려동물 의료체계의 문제점 및 제도개선 방안’에 따르면 스위스는 법적으로 반려동물이 상해나 사망할 경우 보호자는 원인 제공자 측에 특수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스위스 채무법 제43조 1항의 내용은 ‘재산증식 혹은 영리목적으로 보유한 것이 아닌 동물의 상해 또는 살해의 경우 동물의 보유자 혹은 그의 가족을 위한 애호가치를 정당하게 고려해야 한다’이다. 논문은 해당 조항이 동물병원 의료사고 피해 보상의 법적 근거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동물병원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법적 싸움을 이어가는 것과 상반됐다.

우리나라도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9일에는 동물병원의 과잉 진료비 청구를 막는 내용의 수의사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앞으로 동물병원에서는 수술 등 중대 진료를 할 경우 보호자에게 △진단명 △진료의 필요성 △후유증 △동물소유자 등의 준수사항을 사전 설명하고 서면으로 동의를 받아야 한다.

동물진료 표준체계 마련을 위한 발판도 마련됐다. 이번 개정안으로 농식품부 장관은 동물의 질병명, 진료항목 등 동물 진료에 관한 표준화된 분류체계를 작성하여 고시해야 한다. 농식품부는 “동물진료 표준체계 마련과 진료비용 및 그 산정기준 조사·공개로 동물의료 환경의 신뢰성이 제고되고, 동물 소유자에게 제공되는 동물의료 서비스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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