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 대한수의사회는 반대
-“반려동물 문화 개선돼도 산업동물은 여전”
-공공성 인정 못 받는데 의무만...반발 여론 有

한국 사회에서 동물의 위치는 사안에 따라 다르다. 반려동물 가구에서 동물의 위치는 ‘가족’이지만 법에서는 인간이 소유한 재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동물의 지위가 사회적 합의를 얻지 못해 발생하는 갈등은 크다.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 논쟁이 대표적이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의 진료 기록을 보고 싶다는 보호자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수의학계의 입장이 팽팽하다. <뉴스포스트>는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논쟁의 합의점을 찾아보았다. -편집자 주-

(그래픽=뉴스포스트 강은지 기자)
(그래픽=뉴스포스트 강은지 기자)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현행 수의사법에 따르면 수의사는 직접 진료하거나 검안한 동물에 대해 보호자에게 진료기록부를 발급할 의무가 없다. 진료기록부란 환자의 병력과 진료 소견, 치료 내용 등을 기록한 문서로 법적 효력이 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에게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 조항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보호자의 요청에 따라 진료기록부를 발급해주는 동물병원은 존재한다. 하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수의사가 발급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호자들이나 소비자 보호 단체 등은 현행 수의사법이 의료사고나 각종 분쟁 시 동물병원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 지적해왔다.

소비자들의 지적에도 수의계의 입장은 단호하다. 지금은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의무 발급은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한수의사회 관계자는 지난 9일 <뉴스포스트>와의 통화에서 “현재 상황에서는 동물병원이 진료기록부를 공개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안 된다”고 밝혔다. 다만 무조건 반대하다는 게 아니라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를 위한 토대는?

대한수의사회는 ▲ 동물의약품 유통체계 개선 ▲ 동물 진료체계 표준화 ▲ 동물권 인식 향상 등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는 혼란만 가중한다고 주장했다.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안으로, 어느 하나라도 개선되지 않으면 현장에서의 혼란은 피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수의계가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로 가장 크게 우려하는 점은 동물의약품 오남용 문제다. 현재 동물의약품은 일부를 제외하면 수의사의 처방 없이 구매가 가능하다. 여기에는 마취제나 호르몬제 같은 위험한 약품도 포함돼 있다. 제도적으로 약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세부 내역을 공개하면, 상대적으로 값비싼 동물병원 진료보다 보호자가 임의로 처치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가축 등 산업동물들의 자가 진료는 허용됐다. 해당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현행법에 따르면 가축 등 산업동물들의 자가 진료는 허용됐다. 해당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특히 가축 등 산업동물의 자가진료는 의약품 오남용 문제를 넘어 수의사들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진다. 반려동물은 자가진료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으나, 산업동물은 예외적으로 허용됐기 때문이다. 대한수의사회 관계자는 “반려동물 문화가 발달했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동물권 인식은) 높지 않다고 본다”며 “진료기록부 발급으로 치료 내용이 한없이 공개되면, 산업동물을 진료하는 수의사들은 정말 자리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동물 진료체계가 표준화되지 않는 점도 문제다. 진료체계가 표준화돼있지 않아 수의사마다 용어나 항목, 치료방법 등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대학 등에 위탁해 올해 6월부터 표준화 연구를 시작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연구가 완성되려면 최소 4~5년은 걸린다는 게 수의계의 판단이다.

관계자는 “저희가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게 아니다. 약품 유통 체계를 개선하고 의료 행위가 사람 수준으로 이뤄지면 법 개정이 가능할 거라고 본다”며 “진료항목이 표준화돼있지 않아 각 동물병원마다 기록하는 양식이 다를 건데, 진료기록부를 공개하면 전문가의 해석이 필요하다. 아무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공개면 혼란만 가중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발급 의무화? 동물진료 공공성 인정부터”

수의계는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에 반발하는 데에는 동물진료의 공공성 인정 문제도 있다. 동물진료가 공공성이 있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무 조항만 추가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지난해 초 코로나19 사태 발발로 일어난 마스크 대란 당시 동물병원은 마스크나 소독용 알코올 등 필수 기자재를 지원받지 못했다. 대신 정부는 사람을 진료하는 의료기관에 우선 지원했다. 이 같은 정부 조치에 반발하는 여론은 현장 수의사들을 제외하면 크지 않았다.

관계자는 “사람의 경우 병원이 폐업하면 진료기록부를 보건소에 보관하도록 법적으로 돼 있다. 의료기록은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하겠다는 것이다”라면서 “동물병원은 폐업 시 기록이 그냥 없어지는 거다. 정부에서도 동물진료에 대해 공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법적으로 역할도 없다. 단지 보호자들 민원이 많다는 이유로 동물병원에 규제나 의무를 부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동물에 대한 인식이 강해졌다. 예뻐한다는 의미의 ‘애완동물’이라는 용어는 함께 살아간다는 ‘반려동물’이라는 말로 대체됐다. 동물권 문제도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동물진료의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현장의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보호자들의 권리를 위해 진료기록부 발급해야 한다는 주장과 시기상조라는 주장은 여전히 평행선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양측 주장의 합의점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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