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동물의 위치는 사안에 따라 다르다. 반려동물 가구에서 동물의 위치는 ‘가족’이지만 법에서는 인간이 소유한 재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동물의 지위가 사회적 합의를 얻지 못해 발생하는 갈등은 크다.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 논쟁이 대표적이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의 진료 기록을 보고 싶다는 보호자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수의학계의 입장이 팽팽하다. <뉴스포스트>는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논쟁의 합의점을 찾아보았다. -편집자 주-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 A모씨의 2살 배기 반려견은 내시경 시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 평소 건강했기 때문에 A씨는 반려견의 사망을 의료사고로 보았다. 진료기록부를 보고 싶다는 A씨에게 동물병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진료기록부 발급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A씨는 사랑하는 반려견이 무슨 이유 때문에 죽게 됐는지 알고 싶었지만, 동물병원의 태도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동물병원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반려동물을 잃고도 사인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동물병원에서는 진료기록부 의무발급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현행 수의사법에 따르면 수의사는 직접 진료하거나 검안한 동물에 대해 진단서와 검안서, 증명서 또는 처방전 발급을 요구받았을 때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진료기록부는 해당 사항이 아니다.
진료기록부란 환자의 병력과 진료 소견, 치료 내용 등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부당한 진료 비용이나 의료사고가 의심될 때 법적 증거 자료나 기타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사람의 경우 의사는 환자의 진료기록부는 의무적으로 작성해야 하고, 보존 기간도 최소 10년이다. 환자의 요청 시 의사는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제출을 거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부 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보호자에게 진료기록부를 발급하지 않아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동물병원 관련 소비자 분쟁은 해마다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동물병원 관련 피해 상담은 지난 2016년 331건, 2017년 358건, 2018년 253건, 2019년 337건으로 집계됐다.
‘진료기록부 의무화?’ 국회는 멈췄다
동물병원과 반려동물 보호자 사이의 분쟁이 꾸준히 제기되자 국회에서도 진료기록부 의무화를 포함한 법안이 나왔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올해 6월 대표 발의한 수의사법 일부개정법률안에는 동물병원도 사람을 치료하는 일반 병원과 마찬가지로 진료기록부 발급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해당 법안은 소관위원회에 회부됐지만, 별다른 논의가 없다. 제21대 국회에서만 3차례 개정안이 나왔다.
수의학계는 동물병원 진료기록부 발급 의무화에 반대 입장이다. 동물 진료 체계가 사람과 달리 표준화돼있지 않다는 게 대표적인 반대 이유다. 표준화돼 있지 않기 때문에 진료기록부의 내용은 수의사 개개인의 지적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진료기록부 공개 시 동물 의약품 오남용 우려도 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수의사 신문 데일리벳 보도에 따르면 허주형 대한수의사회장은 올해 6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진료기록부를 갖게 되면 동물병원에 오지 않고도 약을 마음대로 사서 쓸 수 있다. 수의사법이 의료법처럼 돼 있다면 공개할 수 있다”며 “진료부를 공개하지 못한 책임은 수의사가 아니라 정부에 있다”고 비판했다.
수의학계의 지적을 해결하기 위해 동물 진료 표준화 관련 법안도 나왔다.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은 올해 8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주재로 동물 진료 항목 및 행위 표준화 조사·연구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수의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해당 법안 역시 소관위원회에 회부된 상태에서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