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신 경기 북부 평화시민행동 활동가 인터뷰
경기도에만 성병관리소 6곳..."더 많을 수 있어"
목숨 건 탈출 이유..."하루 안 나오면 3일치 깠어"
UN도 철거 반대..."평화박물관 건립도 가능해"

불완전한 독립은 또 다른 역사적 아픔을 낳았다. 곧바로 이어진 동족상잔의 비극과 군사 독재는 무수한 국가 폭력을 양산했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국가 폭력의 양상은 성폭력까지 확대됐다. 기지촌 여성들을 향한 잔인한 국가 성폭력은 권위주의 시대와 함께 남성중심적 문화까지 더해져 오늘날까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뉴스포스트>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비극을 작게나마 지면에 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 인근에 위치한 옛 성병관리소 건물.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 인근에 위치한 옛 성병관리소 건물.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주한미군 주둔지인 경기도 동두천시에는 안보와 경제만을 우선시했던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요산 입구 대형주차장 인근에 자리 잡은 옛 성병관리소 건물이 대표적인 예다. 

성병관리소는 주한미군 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던 이른바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세워졌다. 성병이 발병했거나, 발병 의심만으로도 여성들은 이곳에 불법적으로 감금돼 비과학·비위생적인 성병 치료를 강제로 받아야 했다. 완치 판정을 받기 전까지 성병관리소 밖을 나올 수도 없었다. 여성들이 우짖는 소리가 마치 동물원 안 원숭이 같다는 이유로 성병관리소는 '몽키하우스'로 불렀다.

민주화 후 시민의식이 성장하면서 성병관리소에서 벌어진 일들이 반헌법적인 인권침해이자 국가폭력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지역 사회에서는 옛 성병관리소 건물을 보존하고 역사적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됐다. 하지만 동두천시가 지난해 소요산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옛 성병관리소 건물 철거 계획을 발표하면서 갈등이 일어났다.

일부 소상공인들은 동두천시의 계획에 환영 의사를 밝혔다. 반면 시민사회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경기 북부 지역 단체를 중심으로 설립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전국 단위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합세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위원회 회원들은 아예 옛 성병관리소 인근에 농성장을 짓고, 6개월 가까이 3교대 24시간 철야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뉴스포스트>가 지난 13일 만난 최희신 경기 북부 평화시민행동 활동가도 위원회 회원이다. 최 활동가와의 인터뷰는 같은 달 20일 '[인터뷰 上] 사회는 멸시·국가는 침묵...기지촌 여성들에게 정의는 없었다'로 보도됐다. 인터뷰 전편에서는 주한미군 기지촌 문제 전반을 다뤘다. 후편에서는 옛 성병관리소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의의를 톺아봤다.

옛 성병관리소 건물 앞 감시 초소. 성병관리소를 탈출하려는 여성들을 감시하기 위한 공간이다.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옛 성병관리소 건물 앞 감시 초소. 성병관리소를 탈출하려는 여성들을 감시하기 위한 공간이다.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기지촌 성병관리소 실체는?

최 활동가에 따르면 과거 성병관리소는 경기도에서만 최소 6곳이 존재했다. 경기도에 전체 주한미군 기지 60%가 집중되면서 성병관리소도 몰려 있었다. 그는 "경기도 밖의 주한미군 기지에서도 성병관리소가 운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과거에 성병관리소가 얼마나 있었는지 국가가 나서서 파악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국의 기지촌 곳곳에서 운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병관리소는 현재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최 활동가는 전국의 도서관을 뒤져가면서 경기도에서만 최소 6곳의 성병관리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건물이 통째로 남아있는 사례는 동두천시의 옛 성병관리소가 유일하다.

기지촌에서는 성병관리소와는 별개로 '성병진료소'도 운영됐다. 성병진료소는 기지촌 내에서 1~2곳이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추후에는 보건소나 문화센터 등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성병진료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강제로 성병 진료를 받아야 했다. 성병이 판명되거나 의심되면 성병관리소로 강제 수용됐다. 

최 활동가에 따르면 동두천시 옛 성병관리소의 수용 인원은 운영 초인 197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가장 많았다. 최 활동가는 "수용 인원이 가장 많았을 때에는 1년에 1만 2천 명에 달했다. 한 사람이 여러 번 수용됐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한 것"이라면서 "수용 인원은 해마다 줄어들면서 1980년대부터는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성병관리소와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누락되거나 폐기됐다. 특히 사망자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성병관리소 수용자들 중 사망자도 있었다는 주장은 함께 수용됐던 여성들의 목격담으로만 남아 있다. 감금을 피해 탈출하려다 추락사하거나, 잘못된 진료로 사망한 여성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게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운이 좋게 살아남을지라도 성병관리소에서 겪었던 상흔은 컸다. 최 활동가는 "독한 페니실린 항생제를 커다란 주사기에 담아 여성들에게 놔줬다. 주사 바늘도 오늘날처럼 얇은 게 아니라 고전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굵은 유리 재질이었다"며 "주사를 많이 맞은 피해 여성들 중에서는 불임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겪기도 했다"고 전했다.

성병관리소에 강제 감금된 기지촌 여성들은 신체적·정신적 피해만 입은 게 아니다. 경제적인 피해도 상당했다. 성병관리소에 감금되면 짧게는 3~4일, 길게는 일주일 이상 수용됐다. 포주에게 고용된 기지촌 여성들의 경우 감금 됐다는 이유로 일당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다.

최 활동가는 "기지촌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아프고 수치스럽다고 해도 목숨을 걸면서까지 성병관리소를 탈출하려고 했던 게 이해가 안 됐다"며 "길어도 1주일만 버티면 대부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 활동가의 의문은 기지촌 여성과 대화하면서 곧 풀렸다.

이어 "하루는 그분에 제게 말했다. '하루 일을 못하면 3일 치를 깠어'라고. 그 순간 모든 게 이해가 됐다"며 "포주에게 고용됐을 경우 하루만 일을 못해도 3일 치 일당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성병관리소에 안 잡혀가려고 기를 쓰고, 잡혀도 목숨 걸고서라도 탈출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 인근에 세워진 옛 성병관리소 철거 반대 농성장.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 인근에 세워진 옛 성병관리소 철거 반대 농성장.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옛 성병관리소 건물의 역사적 가치

국가가 자국민 여성의 성병을 관리한다는 개념은 국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동두천에 남은 옛 성병관리소 건물은 엄혹했던 시기의 국가가 국민을, 특히 여성들을 어떻게 착취해 왔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이 때문에 국내 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국제기구에서도 옛 성병관리소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했다.

앞서 위원회는 지난해 9월 UN에 옛 성병관리소 철거 중단과 보존 개발을 위한 특별 긴급 진정을 제출한 바 있다. 이에 UN특별보고관들이 인권위원회 결의 서한을 같은 해 11월 15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최 활동가는 "UN에서 약 2달 만에 답변이 왔다"며 "매우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답변이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UN인권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우리는 동두천시가 옛 성병관리소라는 역사적 유적지를 철거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며 "우리는 역사적 장소의 철거가 해당 장소에서 발생한 심각한 임권침해를 조사·기억·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명백하게 위반하는 행위임을 상기한다"고 전했다.

국민들 역시 옛 성병관리소 건물의 역사성을 지지하고 있다. 위원회가 국회에 올린 옛 성병관리소 건물 철거 반대 청원은 게시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5만 명이 동의했다. 해당 청원은 국회여성가족위원회에 배정됐다. 다만 12·3 계엄 사태 이후에는 별다른 논의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최 활동가는 "'기지촌 여성'이 되고 싶었던 여성들은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들을 하루에도 몇 명씩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라며 "우리는 과거의 일을 직면해야 하고, 잘못을 했다면 사과를 해야 한다. 또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과거와 역사를 기억해야 미래를 대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픔이 있었던 옛 성병관리소를 평화와 회복, 치유의 장소로 전환하는 게 진정한 역사적 가치라고 생각한다"며 "기지촌에 살던 사람들의 치열한 삶도 보여 주고, 평화 박물관도 건립할 수 있다. 성병관리소가 있던 공간을 활용한다면 더 훌륭한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뉴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