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신 경기 북부 평화시민행동 활동가 인터뷰
가족에게도 사회에서도 외면당한 기지촌 여성들
기지촌 구성원 전체가 희생..."아픔 어루만져 달라"
불완전한 독립은 또 다른 역사적 아픔을 낳았다. 곧바로 이어진 동족상잔의 비극과 군사 독재는 무수한 국가 폭력을 양산했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국가 폭력의 양상은 성폭력까지 확대됐다. 기지촌 여성들을 향한 잔인한 국가 성폭력은 권위주의 시대와 함께 남성중심적 문화까지 더해져 오늘 날까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뉴스포스트>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비극을 작게나마 지면에 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일제의 폭압을 벗어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맞이하면서 한반도 남쪽 곳곳에는 주한미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미군 부대가 주둔한 지역에는 자연스럽게 기지촌이 형성됐고, 미군 등을 대상으로 한 상권이 발달하게 됐다.
기지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한 상인들은 물론, 이른바 '기지촌 여성'으로 통칭되는 이들도 삶을 이어나갔다. 기지촌 여성들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성매매 종사자들이 그렇듯, 기지촌 여성들 역시 폭력과 멸시에 숱하게 노출 됐다.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 주차장 인근에 자리한 옛 성병관리소 건물은 과거 기지촌 여성들의 삶 일부가 담겨 있다. 1973년 2층 규모로 세워진 성병관리소는 1996년 보건소 조직 내에 성병관리팀이 사라질 때까지 기지촌 여성들을 성병 없이 '깨끗하게' 관리한다는 미명 하에 운영됐다. 성병이 의심만 돼도 여성들은 무차별적으로 감금됐고, 비위생적·비윤리적인 치료가 자행됐다.
기지촌 여성과 관련한 생생한 증거인 옛 성병관리소 건물은 오늘날 철거 위기에 놓였다. 동두천시가 소요산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철거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이에 경기도를 포함한 전국의 시민단체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옛 성병관리소 인근에 농성장을 세우고, 3교대로 인원을 나눠 24시간 철야 투쟁을 170일 이상 이어가고 있다.
<뉴스포스트>는 지난 13일 농성장에서 최희신 경기 북부 평화시민행동 활동가를 만났다. 동두천시에서 나고 자란 최 활동가는 기지촌의 흥망성쇠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도 소속된 최 활동가는 옛 성병관리소 건물을 피해 여성들은 물론 기지촌에 살았던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멸시와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
동두천 출신인 최 활동가에게 미군 범죄는 낯설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주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미군들을 목격했고, 시민운동에 투신한 이후로는 '기지촌 여성'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 활동가는 당시 많은 기지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에 투신한 게 아니라고 밝혔다.
최 활동가는 "직업소개소에서 식당 종업원을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 기지촌에 왔다가 성매매를 하게 된 사례들이 흔하다. 피해 여성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많았다"며 "당시에는 정조관념이 매우 강했던 시절이었다. 어린 여성들이 (성매매가 아닌) 대안을 찾거나, 도망을 가서 다른 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기지촌에 주둔하던 미군들 상당수가 유흥을 즐겼다.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이 제정돼 성매매가 불법이 됐음에도 기지촌 반경 2km는 예외로 뒀다. 사실상 국가가 기지촌 여성들을 '외화 벌이'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국가는 이들로부터 수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지만, 기지촌 여성들의 사회적 대우는 처참했다.
최 활동가는 "'양색시'나 '양공주'라는 멸칭은 양반이다. 1950년대에 주로 불렸던 'UN부인'도 점잖은 표현이다. 더 나쁜 표현도 있었다"면서 "옛날 신문을 찾아보면 버스를 타려는 기지촌 여성에게 승객들이 모욕적 표현과 함께 내리라고 명령하면서 소리 지르고 싸웠다는 보도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은 기지촌 여성들이 미군을 상대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을 거라고 오해하고 있다. 대부분은 돈을 벌어서 가족에게 보냈다. 제가 알고 있는 기지촌 여성들 중에서 부자가 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다들 어렵게 사신다"며 "1980년대 후반 올림픽을 기점으로 더 이상 기지촌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마땅한 수입이 없어지면서 이분들이 살기 더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내가 만난 기지촌 여성"
최 활동가는 시민운동을 하면서 기지촌 여성들과 인연을 맺었다. 어느덧 노년을 맞이한 기지촌 여성들에게 최 활동가는 '언니'나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충청도의 형제자매 많은 집에서 자란 A모 씨도 최 활동가가 만난 기지촌 여성 중 한 명이다. 최 활동가는 A씨를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A씨는 형제자매를 부양하기 위해 직업 소개를 받았다가 '기지촌 여성'이 됐다. 경기도 평택에 도착한 그날 밤, 낯선 미군이 A씨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지촌 여성들은 한 곳에만 머물지 않았다. 평택에 있던 A씨는 동두천에 정착했다. 동두천에서는 한국인 남성도 만나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평택에서 A씨가 기지촌 여성으로 활동했던 사실을 알게 되자 남성은 그를 떠났다. 가장이 떠나자 당장 수입이 끊긴 A씨는 동두천 기지촌에 다시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A씨가 벌어들인 수입은 충청도 본가로 갔다. 가난한 본가에서는 돈을 보내달라고 재촉했다. A씨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하자 가족들은 매몰차게 돌아섰다. 최 활동가는 "어머님은 돈을 많이 보내지 못해서 집에서 버림받으셨다"며 "나중에 본가에 찾아갔지만, 어머님은 가족들에게 '오지 마라 이 더러운 X아'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증언했다.
노년의 A씨를 돌봐준 것은 가족이 아니라 기초생활수급제도와 동두천의 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렵게 홀로 사는 A씨가 노인정에 거주할 수 있도록 협조하고 돌봤다. A씨는 노인정 텃밭에서 소소하게 농사를 지으며 20여 년 동안 살았다. A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동두천시와 지역 내 자원봉사자들이 장례를 도왔다.
최 활동가는 "어머님을 자주 찾아뵀었지만, 기지촌 여성으로 살았던 과거 이야기는 거의 돌아가실 때까지 숨기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게 '내 딸 같다'며 당신께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셨다"며 "기지촌 출신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말년에 좋은 마을 사람들을 만난 어머님은 그래도 운이 좋으신 편"이라고 설명했다.
A씨와 달리 '운이 좋지 않은' 기지촌 여성들은 시간이 흘러도 지역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도 많았다. 최 활동가는 "기지촌 여성들은 하루하루 거친 삶을 살았다"며 "술집에서 일하면 술도 많이 마셨다. 몸이 망가지면서 진통제나 환각제에 노출됐다"고 말했다.
이어 "너무나 거친 삶을 살아서 사람이 거칠어진 사례가 많다. 악다구니가 남지 않으면 삶을 살아가기 어려울 거 아닌가"라며 "만약에 본인의 삶이 여유가 있다면 지독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 지금도 삶이 여전히 어렵다. 그러면 여전히 금전적인 부분에 매달려서 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국가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염치
최 활동가는 기지촌 여성들을 국가폭력 피해자로 봤다. 그는 "'기지촌 여성 100%가 다 국가 폭력 피해자로 볼 수 있냐'고 묻는다면, '모든 건 100%가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저는 (기지촌 여성들이) 이 일에 몸을 담는 순간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가 폭력 피해자에게 국가는 마땅히 배상을 해야 한다. 금전적 배상이나 의료 서비스 등을 지원할 수 있다. 실제로 기지촌 여성 122명은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2022년 9월 1인당 수백만원 수준의 배상을 받기도 했다. 배상액은 소액이었지만, 사법부가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국가 폭력의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최 활동가는 국가 폭력 피해자들에게 금전적 배상 외에도 잘못에 대한 책임 인정과 공식적인 사과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당신들은 아무 잘 못이 없다'라고 먼저 얘기를 해야 한다"며 "사과만으로도 그분들에게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일제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대한민국은 가난했다. 전쟁으로 분단이 되면서 가난은 심화했다. 안보를 명분으로 미군이 진주해야만 했다. 미군들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할 만큼 가난했다. 국가는 경제력은 물론 정치력도 좋지 못했다. 시민들의 의식은 현재 대한민국 만큼 민주적이지 못했다. 최 활동가는 "그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국가는 '당신들은 잘 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멸시당하게 해서 미안하다'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의 사과만으로 기지촌 여성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최 활동가는 ▲ 기지촌 여성 관련 통계 정립 ▲ 실태조사 및 사례 관리 ▲ 적절한 의료 서비스 지원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들의 힘들었던 삶에 대해 기록하고, 그 기록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며 "그들의 현재 삶이 더 고통스러워지지 않도록 국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국가 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과나 배상이 '기지촌 여성' 중심으로만 이뤄지면 안 된다고 최 활동가는 강조했다. 그는 "전국에는 약 150개의 기지촌들이 있었다가 사라졌다. 그곳에서도 기지촌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며 "기지촌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기지촌 문제를 '클럽'과 '술', '여성', '미군 범죄'에만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기지촌 건설을 위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동원됐다. 미군들이 좋아하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도 많았다. 미용실과 약국, 병원, 슈퍼 등을 통해 기지촌에 있던 다양한 구성원들이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들 모두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을 했다"며 "기지촌 구성원 모두의 아픔을 어루만지면 옛 성병관리소 철거 문제에 대해서도 가슴을 열고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