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미군부대 인근서 기지촌 형성
국가 주도 성착취...배제된 피해 여성들

불완전한 독립은 또 다른 역사적 아픔을 낳았다. 곧바로 이어진 동족상잔의 비극과 군사 독재는 무수한 국가폭력을 양산했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폭력의 양상은 성폭력까지 확대됐다. 기지촌 여성들을 향한 잔인한 국가성폭력은 권위주의 시대와 함께 남성중심적 문화까지 더해져 오늘 날까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뉴스포스트>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비극을 작게나마 지면에 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과거 기지촌이었던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빼벌마을 모습. (사진=뉴시스)
과거 기지촌이었던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빼벌마을 모습. (사진=뉴시스)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지난 6일 경기도 의정부시는 '제1회 도시공원위원회'를 열고 '빼벌지구 소공원(1·2·3호) 조성 사업'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과거 기지촌이었던 '고산동 빼벌마을'은 미군 부대가 이전하면서 쇠퇴하게 됐다. 기반 시설이 부족해지고, 노후화가 진행되면서 의정부시가 공원녹지 공간을 확충해 소공원을 조성하기로 한 것이다.

기지촌의 사전적 의미는 '외국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남한에 미군 부대가 진주하면서 기지촌이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주한 미군 부대가 주둔한 지역에는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상권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기지촌이 형성된 지역은 서울 용산구와 경기도 의정부·평택·파주·동두천시, 부산 동구, 대구 남구, 인천 부평구, 전라북도 군산시, 경상남도 창원시, 경상북도 칠곡군 등이다. 의정부시 고산동 빼벌마을처럼 미군 부대가 빠져나간 기지촌은 지역 전반이 낙후되면서 지자체의 정비·정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기지촌에는 병사들의 생활을 위한 식료품점과 식당, 생활용품점, 전자제품점뿐만 아니라 유흥 공간도 자리 잡았다. 클럽과 술집은 물론 성매매업까지 성행하게 됐다.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이 제정되면서 대한민국에서 성매매는 불법이 됐지만, 기지촌 반경 2km는 예외로 뒀다. 주요 고객은 미군들이었으나, 일본인 관광객들도 많이 방문했다.

유흥업에 종사했던 기지촌 여성들은 성폭력에 노출되기 일쑤였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은 강대국 남성들의 손쉬운 착취 대상이었다. 국가는 외교 관계 악화를 이유로 피해 여성들을 보호하지도, 가해 남성들을 처벌하지도 않았다. 사회는 피해 여성들을 배척하고 낙인찍는 등 2차 폭력을 행사했다.

지난 2015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를 다뤘다. 화면은 경기도 동두천시 옛 성병관리소. (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지난 2015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를 다뤘다. 화면은 경기도 동두천시 옛 성병관리소. (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몽키하우스'에 감금된 여성들

국가는 기지촌 여성들이 성매매로 벌어들이는 수입을 '외화 벌이'로 여겼다. 이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여성들에 대한 성착취가 용인됐다. 성매매가 외화 벌이 수단이 되자 많은 여성들은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됐다.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직업소개소에 갔다가 기지촌에 정착하게 되는 등 인신매매도 숱하게 자행됐다.

동두천시에 지어진 옛 성병관리소는 국가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매매를 장려했다는 중요한 물리적 증거다. 성병관리소는 동두천을 비롯해 양주와 의정부·파주·평택 등 6곳에 설치됐으나, 남은 건물은 이곳이 유일하다. 1973년 6766㎡ 2층 규모로 지어진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1996년 보건소 조직 내 성병관리팀이 없어지면서 폐쇄됐다.

기지촌 여성들은 의무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발병하면 성병관리소에 수용됐다. 보건소에서 발급하는 '검진증'을 소지하지 않거나, 미군 등으로부터 발병이 의심된다고 지목받아도 갇혀야 했다. 완치 판정을 받기 전까지 여성들은 성병관리소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감금된 여성들의 우는 모습이 동물원 원숭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성병관리소는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멸칭인 '몽키 하우스'로 불렸다.

이른바 '몽키하우스'에서는 반인륜적인 만행들이 자행됐다. 무고한 시민을 동의 없이 감금한 것도 모자라 강제로 성병 치료를 받게 했다. 치료 방법은 폭력적, 비위생적, 비과학적이었다. 여성들이 맞은 페니실린 항생제 주사는 극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약물 과다 투여로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사망한 여성들도 있었다. 일부는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국가가 성구매자에게 '성병 없는 여성의 몸'을 제공하기 위해 벌인 범죄였다.

지난해 8월 12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해 8월 12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

기지촌 여성의 인권은 민주화가 진행되던 1980년대 말~1990년대부터 문제시 됐다. 민주화에 헌신한 고(故) 문동환 목사의 배우자이자 여성운동가인 고 문혜림 여사는 1986년 의정부시에 '두레방'을 설립해 기지촌 여성들을 돌봤다. 시민사회가 먼저 주목한 기지촌 여성의 문제는 학생 운동 진영까지 빠르게 전파됐다.

동두천시 기지촌에 거주하던 26세 윤금이 씨의 죽음은 여성 인권 문제에 경종을 울렸다. 윤씨는 1992년 10월 28일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 이병으로부터 잔인하게 살해됐다. 윤씨가 살해된 과정과 시신 사진 등이 공개되면서 여성들과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여론의 분노 여파였을까. 마클 이병은 주한 미군 범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1994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2006년 가석방 됐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 피해 여성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피해 여성 122명이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2022년 9월 29일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왔다. 배상액은 한 사람 당 수백만원 수준으로 매우 적었지만, 국가의 책임과 여성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첫 판결이었다. 

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피해 여성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국가 차원의 실태 조사와 통계 수집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국에 유일하게 남은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는 철거 위기에 놓였다. 지난해 동두천시가 소요산 개발 사업을 위해 철거 계획을 발표하면서 예산 편성과 업체 선정까지 사업 속도를 높이고 있다. 

기지촌 여성들을 향한 국가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은 과제들이 많다. 피해 여성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지역민들, 시민단체들이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역사적 현장을 지키고자 싸우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수차례 철거 시도를 저지해 왔다. 하지만 철거를 바라는 주민들과 지자체, 반성 없는 국가와 이들의 싸움은 어떤 결말을 맺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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