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AI 시대 통신량 폭증, ISP 부담 ↑
망 사용료, CP에 망 구축 비용 분담하자는 취지
한미 무역분쟁·망 중립성 위반·트랜짓 비용 과다에
중소 CP 성장 저해 우려까지…"ISP 망 구축 의무화 필요"
[뉴스포스트=최종원 기자] 스마트폰 보급 전 네이트 접속 버튼은 많은 이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피처폰 사용자들은 네이트 버튼을 눌러 무선인터넷을 사용했다가 수만원 이상의 요금폭탄을 맞기 일쑤였고, 2006년엔 한 중학생이 370만원의 이용요금 청구로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됐다.
20여년이 지난 현재도 '네이트'의 악령은 끝나지 않았다. 이동통신사 등 인터넷서비스제공자(ISP)는 구글·넷플릭스 등 대형 콘텐츠제공업자(CP)로부터 망 사용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막대한 트래픽을 유발하는 CP가 ISP들의 망에 무임승차해 유·무형의 이득을 챙기고, 망 유지에 드는 비용은 전혀 지불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ISP들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미래에 인공지능(AI), 자율주행이 보편화되면 통신량은 더욱 폭증할 수 밖에 없고, 트래픽을 모두 ISP가 감당하기엔 어려운 측면이 많다. CP도 공정한 망 생태계 구축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망 사용료' 논쟁은 과거 네이트 요금폭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 이유를 차근차근 따져본다.
불공정 요인 ①. 한미 무역분쟁 우려
2023년 9월 SK브로드밴드(SKB)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업체 넷플릭스 간 망 사용료 소송이 양사 합의로 마무리된 이후 '망 사용료' 논쟁은 한동안 수면 위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트위치의 한국 시장 철수로 망 사용료 문제가 다시 떠올랐고,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와의 관세 협상에서도 망 사용료가 변수로 떠올랐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정한 망 이용 계약을 제도화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국회에서도 지난해 이정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망 무임승차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는데, 구글·넷플릭스 등 대형 CP가 국내 ISP와 망 이용계약을 맺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해민 조국혁신당 의원과 김우영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망 이용계약 공정화법을 공동 대표발의했다.
미국 빅테크 기업에 망 이용대가 지급을 강제하면 어떻게 될까. 트럼프 행정부는 망 사용료를 대표적인 디지털 무역 장벽으로 지목했다. 작년 우리나라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액은 556억6508만달러(약 77조원)에 달하는데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빌미로 방위비 인상·현지 투자를 압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국 기업에 비용을 부과하려 한다면 트럼프 행정부와의 통상 마찰이 불거질 수 있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도 비슷한 기조였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지난 2022년 5월 한미 정상회담 방한 당시 미국 기업의 '망 중립성 원칙'을 보장하는 내용을 합의문에 넣자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당국에서도 우려하는 반응이 나왔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올해 4월 국가별 무역 평가 보고서(NTE)에서 "미국 콘텐츠 제공업체가 지불하는 요금이 한국의 경쟁 업체에 이익이 될 수 있고, 한국의 3대 ISP 독과점 업체(SK브로드밴드, KT, LG유플러스)를 더욱 강화해 반(反)경쟁적일 수 있다"며 "미국 정부는 2024년 한 해 동안 여러 차례 이 문제를 한국에 제기했다"고 했다.
불공정 요인 ②. 인터넷 독점·망 중립성 위반
인터넷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다. 인터넷을 태동시킨 월드 와이드 웹은 '거미집 모양의 망'을 구성해 전세계에 산재된 정보를 무료로 검색할 수 있게 했고, 특허 등록도 따로 하지 않았다. 팀 버너스 리 월드와이드웹 창립자는 "인터넷은 수수료를 지불하거나 누군가의 허가를 맡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공평하게 인터넷망을 이용할 수 있다는 '망 중립성' 원칙은 인터넷의 대전제다. 망 중립성에 의해 ISP는 특정 기업을 차단할 수 없으며, 특정 서비스의 데이터 전송 속도를 느리게 해서도 안되며, 특정 기업에 트래픽 증가를 빌미로 이용료를 차별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5G 투자 감축 등 ISP들의 재무 논리에 의해 망 중립성은 위축되고 있다. ISP는 소비자들이 낸 요금에 의해 운용되지만, 통신망 투자는 줄이고 수입은 늘리는 재무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 자율주행·AI 시대 통신 수요는 더욱 폭증할 수 밖에 없는데, 해저 케이블이나 위성통신 등 새로운 통신망에 대한 투자가 위축돼 품질이 저하되면 소비자 불만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소수의 거대 ISP가 경쟁을 제한해 사실상 망 중립성을 깨뜨리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빅터 픽카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부교수는 <디지털 시대의 뉴딜> 책에서 "극소수의 거대기업이 그것(인터넷)을 지배하고, 경쟁이 미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때는 정부는 공공재로 이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공공재의 제공을 보장하고, 상업적 논리가 망가뜨리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망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ISP들의 투자 위축은 현실이 되고 있다. 통신 3사는 세계 최초 5G를 상용화한 2019년을 정점으로 설비투자(CAPEX)를 조금씩 줄이고 있다. 2019년 각사(SKT 연결, KT 별도, LG유플러스 별도) CAPEX 합산액은 8.77조원이었지만 지난해 기준으로는 6.6조원까지 줄어들었다. 업계는 휴대폰 보급률이 100%를 넘고 5G 가입자 증가 수가 정체돼 투자를 이어갈 유인이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불공정 요인 ③. 해저케이블 의존·높은 트랜짓 비용
통신사가 망 사용료 문제의 핵심인 해저 케이블 인프라 구축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연결되는 해저케이블은 11개로 이웃나라인 대만(15개)보다 적은 수로 알려졌는데, 상당수는 중국·대만·일본 등을 거쳐가 안보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해외 CP가 구축한 케이블도 많아 의존 우려도 커지는 형국이다.
높은 트랜짓(전송대가) 비용도 발목을 잡는다. ISP는 보통 티어1, 티어2, 티어3으로 구분되는데 같은 티어끼리는 트래픽 상호 전송에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런데 티어2에 속하는 국내 통신사로부터 버라이즌, AT&T, NTT, 도이치텔레콤 등 티어1 ISP에 트래픽 전송을 위해서는 트랜짓 비용을 내야 한다.
구글·메타 등 빅테크 CP는 데이터를 미리 저장하는 캐시서버(CDN)를 자체 구축해 트랜짓 비용을 보다 줄일 수 있지만, 빅테크가 아닌 해외 CP는 트랜짓 비용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트위치는 한국 철수 과정에서 트랜짓 비용이 타 국가 대비 10배 이상이 넘는다고 주장했는데, 트위치는 자체 CDN 없이 트랜짓 비용을 내고 데이터를 전송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통신사가 티어1이 되기엔 네트워크 구축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 앞으로 아마존·HBO 등 해외 CP 유치가 더욱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아울러 엠군·판도라 등 서비스를 종료한 국내 사례를 본보기로 중소 CP의 망 사용료 부담을 줄이고, ISP에 망 구축 의무를 부과하자는 제언도 나온다.
백경림 저자는 '중소기업 진흥을 위한 망 사용료 관련 법제의 과제' 보고서에서 "규모가 영세하여 자체 서버를 가질 수 없는 중소 CP는 망 사용료로 인해 존립을 달리하는 해당 분쟁의 당사자"라며 "망 사용료가 스타트업 혁신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지, 국내외를 불문하고 결과적으로 거대한 기업만이 살아남아 시장이 다양성을 상실하게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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