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는 힘차게 창공을 차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원이다"

김한태 성지중 고등학교 이사장(사진= 뉴스포스트)

[뉴스포스트=신현지기자] 강서구 화곡로에 위치한 성지중‧고등학교의 교문 앞,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그가 나와 서 있다. 작달막한 키에 노란 모자, 허름한 작업복과 지긋해 보이는 나이. 그가 학교 건물로 들어가는 학생들을 향해 두 팔을 번쩍 올려 커다란 하트를 날린다. 맞은편의 여드름 숭숭 난 우람한 체격의 녀석들도 그와 똑같은 자세로 하트다. 그중 한 녀석은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와 그를 번쩍 올려 안고는 으쌰으쌰 힘자랑이다. 또 한 녀석은 대뜸 그의 허리를 둘러 감고는 빙그르르 어지럼증을 태우다 슬쩍 떨어트려 놓고는 씨익 뒤통수를 긁는다. 참으로 이해 어려운 장면이다. 아니, 이제 주위의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장면이다. 성지고등학교의 김한태 이사장(83)과 학생들의 등교장면을.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했다. 한 나라의 운명이 청소년의 교육에 달려있다는.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입시 위주 교육으로 청소년 문제의 병폐를 앓은 지 오래다. 학교마다 늘어나는 부적응생과 학교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 이 같은 교육의 현실에서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사랑을 교육의 목표로 길거리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녹여내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앞서 말한 성지중 고교의 김한태 이사장이다. 43년 동안 한결같은 열정으로 아이들을 품은 그의 어깨가 요즘은 더 무거워졌다. 전국의 대안학교(294개)의 법인 설립으로 그가 초대 이사장이 된 까닭이다.

 

TV에서 송포유(성지고 학생들이 출현한 SBS예능프로그램)를 봤다. 그때 그 프로그램을 찍고 성지고등학교가 많은 질타를 받은 거로 안다.

그때 아주 혼났다. 방송에서 여기 아이들을 미화시킨다고 학교 홈페이지가 마비되고, 그것도 학교냐, 깡패 양성소다. 당장 문 닫아라 등, 말할 수 없는 욕을 먹었다.

보는 관점은 다르다. 이 학교 학생들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는 사람도 많았다. 먼저 이 학교의 설명을 부탁한다.

우리 성지는 1972년 영등포 직업학교를 시작으로 올 43년을 맞는 학력인정 대안학교다. 일반학교의 부적응생과 가정 형편으로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 그리고 소년원의 출소자, 배움의 기회를 놓친 중장년층들이 이 학교의 주인이다.

일반학교의 부적응이라면 왕따, 폭행, 폭력의 가해자로 낙인찍힌 문제아학생들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다. 그렇지만 학교의 부적응생은 가해자만 있는 건 아니다. 피해자도 부적응생이다. 그리고 가해자든 피해자든 처음부터 문제 학생은 없다. 사회가,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

현재 이 학교 학생 인원은 얼마나 되는가, 또 수업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현재 학생 수는 600여 명이다. 이 중 내년 2월 졸업생은 200명이 된다. 수업은 일반학교와 마찬가지로 정규과정이고 여기에 제과 제빵, 피부미용, 조리, 방송 연예오디션 등 학생들 각각 특성에 맞는 전문 직업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야구부와 축구부도 70여 명의 학생이 있다. 생각 같아서는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 각각에 맞는 특별활동을 해주고 싶지만 아직은 제정 여건이 어려워 노력 중이다.

이 학교에서 대학진학도 가능한 것인가

 

성지중고등학교(사진=뉴스포스트)

물론이다.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매년 41%가 넘고 있다, 이 학교가 마치 폭력 가해자 집합소로 그저 쓸모없는 사회 낙오자들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고 정주영 회장도 부모의 소 판 돈을 몰래 가지고 나와 상경했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깡패 짓에 마약으로 삐뚤어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인이 되었다. 여기 아이들도 모르는 일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낙인이 찍혔다고 그것을 만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처사다. 그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갈 기회는 주어야 한다. 우리 성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학교를 둥지라고 말한다. 새가 날기 위해 충분히 날개의 힘을 키워나갈 수 있는 공간. 둥지는 힘차게 창공을 차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의 공급원이다. 나는 둥지의 어미 새의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다. 어린 새가 날개를 달기까지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 어미 새. 즉, 사랑의 힘이다. 아이들은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달라진다. 몇 년 전, 군의 총기 사건으로 한창 사회적 물의를 빚던 그때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었다. 어느 학교에 관심병사가 많은지 조사를 했는데 우리 성지에서는 관심병사로 나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전화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놀랍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자유를 준다고 했다. 대신 삼강오륜을 외우지 않으면 졸업을 시키지 않는다고. 자유의 밑바탕에 올바른 인성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그 전화 얼마 후 육군본부 막사에도 삼강오륜을 써 붙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솔직히 반항기의 아이들은 부모도 힘들다. 그들을 사로잡는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관심이다. 칭찬해주고 그 아이들의 개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사랑을 지속해서 쏟아주는 것이다.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아이들은 분명 변화하게 되어있다. 사랑이 부족한 것에서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성지 중 고등학교의 처음 설립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한 것이 1972년이다. 그러니까 올 43년째다. 그때는 정말 글을 모르는 청소년들이 너무도 많았다. 모두 가난 때문이었다. 나 역시 가난의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이기에 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영등포구 초등학교 가건물 1동을 빌려 구두닦이, 신문팔이, 껌팔이, 공장의 노동자 등을 모아서 야학을 시작했다. 영등포 청소년직업학교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2년, 이곳 화곡동에 자리를 잡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지금까지의 행적이 궁금하다

사람은 그 외모를 보면 대충은 자라온 환경을 짐작한다. 난 키 작고 왜소한 체격이 한눈에 봐도 궁색하게 자란 티가 여실하다. 입도선매(立稻先賣), 초근목피(草根木皮)를 겪고 자랐다. 풀과 나무뿌리만을 먹고 자랐다는 뜻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농민의 아들. 고향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수동의 자모터라는 깊은 산골짜기였다. 선조께서 임진왜란을 피해 그곳에 자리를 잡으셨던 곳이다. 사방 산으로 둘러싸여 일조량이 아주 적은 그곳에서 나는 10 형제 중 다섯째였다. 산에 불을 질러 콩이며, 팥, 옥수수 등을 심어 먹는 화전민이었다. 때는 1941년, 4년째 가뭄으로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로 배고픔을 달래는 건 예사였다. 공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속에서 난 집에서 90리 길을 걸어 영양 외가댁을 찾아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정말 학교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도 이런 나를 만류하지는 못했다. 외가를 찾아가 무작정 학교를 찾아갔다. 엄청나게 추운 날씨였다. 겨울 찬바람에 손발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추위 속에 종일 운동장의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교실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는데 누군가 나와 나를 교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교무실로 들어가게 된 난 대뜸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는 초등학교도 시험을 봐야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5문제 중 2개를 맞췄다. 떨어진 것이었다. 이름도 쓸지 모르고, 깊은 산중에서 나무에 불이나 지르고 밭이나 일굴 줄 알았지 본 게 없으니 그럴 만 했다. 위기감에 난 떼를 썼다. 한 번 더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다행히 두 번째 시험에는 3개를 맞췄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본인 여선생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월사금이었다. 외가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3일을 학교 밖에서 빙빙 떠돌았다. 90리 길 집에 돌아가도 월사금을 가져올 형편도 안 되었다. 학교 밖을 빙빙 돌다가 결국 또 떼를 썼다. 그런 내가 얼마나 불쌍하게 보였는지. 교장 선생님에게 그것이 통했다.

하긴 그때 내 꼴은 영락없는 상거지였다. 살이라도 퉁퉁하게 쪘으면 덜 짠할 텐데, 깡마른 데다, 다 떨어진 옷에 발은 맨발이요. 거기에 때는 꼬질꼬질 절어있고, 그런 모습에 반 아이들은 이나까 빼이, 이나까 빼이라고 했다. 나중 알고 보니 그것이 촌놈이라는 뜻이었다. 요즘 말로 내가 왕따였다. 여선생님은 참 좋으셨다. 내게 노트와 연필 한 자루를 주고는 따라오라 하셨다. 따라간 창고에서 찢어진 고무신 한 켤레를 찾아 신게 하셨다. 짚신만 신었던 내가 고무신은 그때 처음이었다. 엿을 먹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영양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5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영양 중학교에 다녔다. 대구 영남일보 신문 배달을 했다. 외가에서 나와 자취를 했다. 밥은 거의 굶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생존의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떼를 쓰면 안되는 게 없다’란 생각이었다. 중학교 2학년인 내가 비위 좋게 면장실에 찾아가 쌀 배급을 타다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들판에 모심기 시찰을 나간 면장에게 무턱대고 찾아가 쌀을 달라고 떼를 쓰다 따귀를 얻어맞기도 했다.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영양중학교에 신한균 교장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나를 많이 귀여워해주셨다. 내 목소리가 크다며 아침마다 교단에 올라가 체조 구령을 부치게 해주셨다. 그것에 자신감을 얻어 웅변을 잘 하게 되었다. 너무도 고마운 분이라 매년 그분의 비석에 찾아가 술을 올린 지 20년 가까이 되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중에 6‧25가 터졌다. 군에 입대해야 했는데 그 당시 육군에 가면 죽는다는 소문에 공군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렸다. 그 바람에 공군은 시험을 봐야 했다. 그런데 난 시험은 합격인데 키가 작고 깡말랐다는 이유로 여러 번 탈락 위기였다. 그때마다 임기응변(臨機應變)과 목소리가 큰 덕분으로 탈락 위기를 넘겼다. 그렇게 공군(21기)에 배속되어서는 공군본부까지 오게 되었다.

공군본부에 와서는 사령관의 신임을 얻어 조달업무를 맡았다. 요령을 모르고 원래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니 인정을 받게 된 것인지 당시 샘표 간장 사장이 시발택시를 불러 태워 보내기도 했다. 공군의 쌀 창고도 맡았다.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도 내가 검수했다. 전 군의 웅변대회에서 3위를 하기도 했다. 그것에 진급되고 차도 나왔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하면서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은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교에서 공부했다.

군에서 나온 것은 5‧16혁명 이후였다. 군에서 나오자마자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를 설립했다. 그때가 1972년 4월 22일이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껌팔이, 공장 직공, 앵벌이 등을 모아 야학을 열었다.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해주었다. 영등포 초등학교 가건물을 빌렸는데 교장 선생님이 우려가 컸다. 신발이 없어진다, 유리를 빼간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다 책임진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을 한 학교가 1978년 강서구 교남회관(복지시설)지하 강단으로 이전해 강서청소년직업학교로, 1982년엔 직업학교에서 성지중고등학교로, 1989년에는 학력 인정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2001년 도시형 대안학교 지정을 받아 2016년 올해로 28회째 이르렀다.

성지중고등학교(사진=뉴스포스트)

주위에서 후원 혹은 격려를 하지 않는가. 주위의 시선이 궁금하다  

천만에 날 미쳤다고 한다. 돈도 되지 않는 그 일을 지금의 그 나이에도 왜 하느냐고, 더구나 집에서도 포기하고 버리는 애들에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래서 난 그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모두가 포기하고 방치하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또 사회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한 번의 실수로 평생 사회 낙오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 불쌍하지 않으냐고. 난 아이들은 나라의 보배라고 생각한다. 관심과 사랑이 충만한 우리 학교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얼마든지 가능성 있는 사회인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학교의 졸업생들 때문이기도 하다. 45년 동안 약 15,000명 정도가 이 학교를 거쳐 사회에 진출해 있는데 이 학교가 없어진다면 그들의 느낄 배신감은 말로 표현 못할 것이다. 가끔은 외국에서도 학교 졸업장이 필요하다고 전화가 온다. 그러니 내가 쉽게 학교의 문을 닫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294개의 대안학교가 드디어 법인설립 승인이 되었다. 그리고 초대(初代) 이사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소감을 부탁한다.

사회질서가 확립된다 하더라도 소외계층은 생기게 마련이다.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청소년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럼 거기에 따른 정부의 대책이 마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껏 정부시책은 번듯한 자율형 사립고나 국제고, 마이스터고 등에는 관심을 가져도 우리와 같은 특수학교는 돌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난 그런 불공정한 처사에 맞서 나는 정부와 수없이 싸웠다. 어쨌거나 2016년에야 숙원이었던 전국의 294개의 대안학교가 법인설립 승인을 얻게 되었다. 물론 나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부족한 내가 초대 이사장에 앉게 되었다. 그러니 많이 부담스럽다. 나 같은 늙은이가 그럴 깜냥이나 될는지. 대안학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해달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할 생각이다. 약자들의 영원한 이정표로 남을 결심인 만큼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또 그만큼 보람도 컸을 것이고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면 부탁한다.

전과 13범, 소년원을 6번 다녀온 녀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영등포 유흥업소의 일명 왕초였다. 그 녀석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우리 학교로 온다는 소문에 전화통이 불이 났다. 받아주면 큰일이 날 테니 절대 받아주지 말라고 했다.

그날 오후 얼굴에 칼자국에 팔에 문신까지 새긴 녀석이 제 엄마와 함께 내 방을 찾아왔다. 놈의 하는 짓이 말 그대로였다. 쪽팔리게 코딱지만 한 학교에 데리고 왔다고 내 책상을 발로 걷어차고 난리였다. 그런 녀석과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학교는 그날부터 긴장에 들어갔다. 영등포경찰서 요시찰 인물이 왔으니. 아이들은 슬슬 눈을 내리깔고 녀석을 피해 다녔다. 선생님들에겐 내가 관리 할 테니 놔두라고 했다.

 그런데 하루는 녀석이 학교 앞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소리에 가보니 녀석이 한여름 땡볕에 소주를 두 병이나 차고서는 선후배도 모르는 놈들 군기를 잡겠다며 길길이 뛰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빙 둘러 손가락질이었고.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살살 달래 내 방으로 데리고 왔다. 와서는 녀석이 차고 있는 소주를 대뜸 빼앗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랬더니 녀석이 더운 여름에 그 연세에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하느냐며 말렸다. 말이 통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말했다. 니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아야 여기 있는 아이들도 졸업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문을 닫을 판이다. 그러니 내 말을 듣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나는 믿는다. 한참 내 말을 듣던 녀석이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었다. 피우라고 했다. 그랬더니 녀석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웃었다. 담배를 피우라는 교장도 있다고. 그런 녀석에게 표창장을 주겠다고 했다. 앞으로 모범이 될 수 있으므로 라는 표창장을. 녀석은 표창장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교실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녀석을 학급 반장에 임명했다.

 녀석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신문사에서 여러 번 나왔다. 다들 돌아가라고 했다. 늘 살얼음을 딛는 것 같았으니. 그 녀석이 전문대학에 합격소식이 있던 날은 영등포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그 녀석 졸업식엔 기자들의 카메라가 10대도 넘었다. 연예인을 방불케 플래시가 터졌다. 녀석도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것인지 찍을 테면 찍어라 인터뷰에 포즈까지 취해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신문에 나오자 녀석의 엄마와 외삼촌이 학교에 와 전화통을 때려 부수고 책상을 뒤집어엎고 그런 난리가 아니었다. 아들 장가도 못 가게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찾아와 사과 하기는 했다.

그 녀석이 대학에서 중장비 자격증을 세 개나 따고 군대에 갔는데 하루는 부대에서 나를 불렀다. 전과 13범, 그 녀석이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일을 맡길 수 없으니 교장 선생님이 한 번 다녀가라고. 연천까지 찾아갔다. 아침 일찍 그곳에 찾아가 대대장실에 들어가 앉았는데 누군가 들어와 내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이었다. 그녀석이였다. 놈이 “이제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교장 선생님 덕분에 마음잡았습니다. 앞으로 잘할 겁니다. 그러니 바쁘신 저희 교장 선생님 와라가라 하지 마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목이 콱 잠기었다. 내가 그 녀석 장가갈 때 주례까지 서주었다.

감동이다. 전과 13범을 그렇게 교화시킨 힘은 과연 무엇인지 교육 철학을 듣고 싶다

사랑이다. 사랑은 빛도 없고 형태도 없지만, 그 에너지는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사랑은 그 어떤 아이도 달라지게 되어있다.

앞으로도 이렇게 감동 있는 일화를 종종 전해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건강해야 하는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매일 아침 운동을 한다. 많이 걷고. 소식하고. 박장대소,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재학생들과 또 졸업생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열등의식을 버리고 힘차게 매진하라 당부하고 싶다. 무슨 일을 하든 당당해지라고. 나 역시 여러분들이 당당해질 수 있게 모교의 후진양성에 힘쓸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절대 부끄럽지 않은 모교로 만들어 갈 테니 꼭 지켜봐 달라 말하고 싶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보다시피 학교 공간이 무척 협소하다. 지금 이 건물을 헐어내고 15층으로 올릴 생각이다. 교사 안쪽에는 평생 불우학생들을 위해서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채규철, 양영모, 김창묵 교장의 비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물론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분들이다. 신문을 보고 조문을 갔는데 조문객도 없이 참으로 쓸쓸하기 그지없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듯 마음이 쓰였다. 기억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학교를 증축하면 저분들의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나 역시 힘이 다하는 날까지 불우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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