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주영 “길에서 예술을 줍다.”

김주영 화가

[뉴스포스트=신현지 기자] “길에서 예술을 줍다.” 뭔가 언어가 근사하다. 길에서 예술을 줍다니. 언어는 그 사람 생각의 반영이다. 김주영 화가, 그녀가 궁금했다. 기존의 틀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로 예술혼을 불태우는 화가.

그녀가 최근 경기문화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김주영의 노마드 길 따라 마을 따라>를 출간했다. 바람처럼 떠돌고도 늘 방황을 꿈꾸는 화가. 그녀에게 있어 방황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 내기 위한 역사적 관념의 이탈이며 세상에서 길을 잃은 자유로움이라고 했다. 그녀의 책 출간을 빌미로 만남을 청했다.

안성 아틀리에를 벗어난 김 화가의 서울 나들잇길을 이용한 만남이었다. 때문에 긴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첫눈에 화가는 작고 왜소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런 여린 몸으로 오랜 세월 세계를 유랑한 것일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그러나 낭랑한 목소리와 강한 눈빛만큼은 안락한 대학 교수직을 호기롭게 내려놓고 예술의 본고장 프랑스로 인도, 몽골, 영국, 아프리카 등으로 떠돈 그 당참을 충분히 짚어낼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작품까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난 그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특히 그녀가 벌이는 퍼포먼스며, 제식형식으로 나타낸 오브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즉, 그녀의 노마드가 지극히 생소했다.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이동하는 탈질서적인 것이라니.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모두 기존의 질서를 질타하는 형태의 것이라니. 모호한 내 눈빛을 읽은 것인지 그녀는 쉽게 말해 유랑주의라고 설명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자유로움의 사유. 그 자유를 예술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방랑에서 얻어진 것이니 자신은 길에서 예술을 줍는다 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김주영 화가 작품 "바라봄"

그러니 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는 노마드를 구축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고. 그녀는 자신의 타고난 DNA 탓이라고 했다. 또 자란 그녀의 환경 탓이고.

“난 아버지의 얼굴을 몰라요. 어릴 적 어머니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지요. 대신 매일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넣어주셨어요. 난 집안에서만 혼자 놀았어요. 그 때문인지 자주 꿈을 꾸었어요. 어딘가로 멀리 떠나는 그런 꿈을. 홍익전문대 교수로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프랑스로 떠났어요. 남들은 그런 날 더러 미쳤다고 했어요. 왜 그런 좋은 직업을 박차고 나가느냐고. 특히 어머니는 더 그러셨어요, 결혼도 하지 않은 절 매우 걱정하셨지요.”

그녀는 찻잔을 집어 들다 말고 지극히 마른 웃음으로 마치 남의 얘기를 전달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 간 건 1986년. 그녀는 1992년 파리 8개 대학에서 조형예술과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2006년까지 프랑스 문화성이 제공하는 예술가촌에서 머물렀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에도 선천적인 방랑병을 이기지 못하고 인도, 몽골, 영국,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을 떠돌았다. 그렇게 발길 머무는 곳이면 어디든 아틀리에로 삼을 수 있으니 좋았다고. 몽골의 초원지대의 목동이 되었다가 티베트의 차마고도 여인이 되어 본 것도 그때였다며 그곳 여인들의 질곡 된 삶을 얘기했다.

여인의 몸으로 쉽지 않았을 거라는 물음에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신감은 늘 충만했다고. 그런 자신감은 가보지 못한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며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유랑의 길에서 영감을 얻어 노마드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라고.

“노마디즘 적 사유란 내게 우울이고 흥취고 놀이지요. 또 전적으로 이질적인 타자의 땅으로 떠나 돌아올 기약 없는 여행이에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정년을 마친 그녀는 현재 경기도 안성에 마련한 ‘흙’ 아틀리에서 토탈아트 세계를 열고 있다. 회화, 영상, 오브제, 서양화 퍼포먼스 등. 특히 그곳에서의 벌이는 그녀의 퍼포먼스(메밀밭 밟기와 분토길)는 그녀의 지인들까지도 퍼포먼스에 참가시켜 주제를 확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식祭式 형식으로 나타난 오브제 역시도 우리나라 미술계에선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함이라 관람객의 호응이 높다는 평이었다. 물론 무신론자인 그녀에게 있어 제식祭式은 여전히 떠나고 싶은 미지의 세계이며 돌아올 기약 없는 타자의 땅이지 그 어떤 신을 향한 염원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자유로운 예술세계로 미술계에 주목을 받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행복할 때는 아직도 여전히 예술작업을 할 때라고. 특별한 철학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깜짝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무슨 철학이유, 그냥 내 멋대로의 자유롭게 사는 게지.”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책을 보라며 자신의 <김주영의 노마드 길 따라 마을 따라>를 내밀었다.

 “난 오늘 즐겁게 당신 얼굴이나 볼까 했는데 무슨 인터뷰요. 그런 건 관두시고 나중에 이 책이나 한번 봐 주시요. 그럼, 이 김주영이라는 여자가 세상을 어떻게 유랑하며 길 위에서 예술을 주운 것인지 알게 될 터이니.”

검은색 바탕의 두툼한 양장본이 꽤 고급스럽다는 느낌이었다. 출판의 모든 과정을 그녀 혼자 하느라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했다.            

고희의 나이에도 얼핏얼핏 선머슴 같은 이미지가 느껴지는 그녀에게 첫사랑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있었다고 했다. “내 여고 때의 과외선생이었지요. 폐가 안 좋아 요양 차 내려와 있던 사람이었는데 많이 좋아했어요. 프랑스에서 돌아오자마자 찾았지요. 불행하게도 세상을 뜨고 없더라고요.” 차르르 내려감는 눈에 설핏 애수가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 뒤늦게 자리를 함께한 김명자 전 안동대 교수가 깜짝 놀라 되물었으니. “정말? 선생님에게도 그런 로맨스가 있었단 말이오?” 40년 지기지만 처음 듣는 소리라고 했다.

“몰랐어요. 그간 우린 통 그런 얘기는 안 했으니까. 아무튼, 김 선생은 괴짜예요. 자유로운 영혼이라 작품이 아주 독창적이에요. 그런데 안타깝게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가 없어요. 초대전시회 아니면 작품을 내보이지 않으니까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김 화가의 초대전은 여러 번이었잖아요.”

마지막 올 그녀의 계획을 묻자 그녀는 이태리 마을 미술프로젝트에 초대되어 그곳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미술계에 바라는 질문에는 미술행정가와 예술가가 조화를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행정가는 행정의 일만, 예술가는 예술에만, 몰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술작품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들이 작품을 평가해서 올리고 내리고 그 때문에 예술가들이 그들의 갑질에 비위를 맞추려 전전긍긍하는 그런 모습들, 이젠 그런 것들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큐레이터들 역시 미술에 대한 제대로의 지식을 갖추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안성은 금방 해가 저문다며. 아니, 예술을 줍기 위한 바쁜 몸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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