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책개발의 산실을 꿈꾸며”

전재섭 한국정책개발학회장(사진=전재섭 회장 제공)

[뉴스포스트= 신현지 기자] 한국정책개발학회의 신임 학회장으로 전재섭 한국투표행태연구소 소장이 선임되었다.

처음 전 회장을 만난 것은 약 6년 전쯤. 충정로의 아리수선진화기획단장실이었다. 그날은 문인으로서 만남이었다. 그의 첫 시집 ‘ 전설’이 교보의 베스트셀러 순위 안에 입성한 때이기도 했다. 그날 첫 인상에서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그가 소년 같다는 느낌이었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 안고 젊음을 버텼다는 흔적이 전혀 찾아지지 않을 만큼 그는 해맑았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함바집으로 공사판으로 공장으로 전전해야만 했던 남루한 고학의 시절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초등학교만을 나와 중ㆍ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7급 행정직 공채로 또 행정학박사가 되기까지.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했던 그를 한국정책개발학회장으로 다시 만나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한국정책개발학회장으로 다시 만나는 전 회장, 그에게서 6살 어린 소년의 눈물 젖은 눈망울이 그려졌다.

 

장수하늘소의 전설 1

“6살 어린 소년의 눈에 눈물이 젖고 있습니다.

단독이 온몸을 뱀처럼 감고 생명을 빨고 있습니다.

기침이 끊이질 않고, 가슴을 물어뜯어 목구멍을 타고 핏물이 흐릅니다.

숨소리 점점 가늘어지며 떡을 먹고 싶은 소년이 울고 있습니다.

읍내에 있는 떡집과 병원은 그림 속에 있습니다.

울다 잠이 든 소년이 뒷동산 참나무에 올라가 참나무 진을 빨고 있는

장수하늘소를 어루만지자 소년은 장수하늘소로 변하고

그 주위를 풍뎅이들이 춤추며 돌고 있습니다.

장수하늘소가 된 소년은 숲을 돌아 계곡을 넘어 푸른 하늘을 납니다.

하늘 높이 날아올라가 반짝이는 초록별을 잡으려는 순간

몸은 다시 소년으로 변하고 천둥 속에 끝없는 추락....(생략)”

 

6살 떡을 먹고 싶었던 소년, 그러나 떡집은 현실에 잡히지 않는 머 언 그림 속. 그래서 소년은 창공을 차고 오르는 장수하늘소의 전설을 꿈꾸었던 것일까. 장수하늘소를 쫓던 소년이 이제는 신임 한국정책개발학회장이 되어 소감을 밝혔다.

한국정책학회장으로서 청신한 기운을 불러일으키겠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로 그 어떤 선진국보다도 치안이 완벽한 나라였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자존심 역시도 굳건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 난 지난해 11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토요일이면 태평로에 나가 광장의 소리를 듣는다.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 시청광장의 태극기 물결, 상반된 주장, 막말. 이런 것들을 보며 우리사회의 갈등과 정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민주국가를 떠받치는 법치주의와 국가의 권위가 실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은 열정이고 정의다. 정의가 활활 타오를 때 선진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책 차원에서 국가와 지방의 정책 결정이 밀실이 아닌 다수의 참여로 결정되고, 그 방향이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삶을 유익하게 한다는 대전제 속에 한국정책개발학회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정책개발학회는 교수와 행정가 등 300명으로 구성된 권위 있는 학회다. 모두 대학과 연구실에서 이론과 실질을 겸비한 정책 브레인들이다. 그러니 학회회원들은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는 선비정신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학회 회장으로서 우리 학회에 청신한 기운을 불러일으킬 생각이다. 사람 냄새나는 인간적인 학회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학술세미나, 이슈 정책토론회 등을 보다 활성화해 나갈 계획이다.”

이처럼 담대한 소감을 밝힌 전재섭 학회장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이 자리를 통해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기로 했다.

35년간의 공무원, 문민정부시절의 총괄팀장, 참여정부시절의 지방이양추진위원, 행정학 교수 

전 학회장 그는 서울시에서 35년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부이사관으로 퇴임했다. 문민정부시절엔 서울시 행정쇄신기획단 총괄팀장과 참여정부시절의 지방이양추진위원회의 실무위원, 한강사업본부 운영부장, 상수도사업본부 아리수선진화 기획단장까지 굵직굵직한 정책의 자리엔 항상 그가 있었다. 끊임없는 그의 노력에서 얻어진 길이었다. 그는 지금껏 걸어온 자신의 길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 어린 시절은 배고픔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상경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주경야독했다. 공무원이 되어서는 건국대에서 “도시저소득층의 주거안정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에서는 한국유권자의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땐 정말 잊을 수 없는 벅찬 감격이었다.

특히 박사학위 논문에서 내 이름자 이니셜(JS)을 딴 “투표행태의 JS 모델”은 이 분야 연구의 독창적인 모델이라서 자부심의 한 원천이 되었다. 공직에 있을 때는 겸임으로 서울시립대에서 “행정국가론”을 강의했다. 현재는 경복대에서 초빙교수로 사회복지를 강의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정책개발학회는 17년 전 학회 창설멤버로서 학회의 총무위원장, 등기이사, 수석부회장을 역임했다. 아마도 이러한 점 등이 인정받아 학회장에 당선된 듯하다.

어쨌거나 지금의 주요 관심사항은 학회 회장으로서, 학회의 학술토론회 활성화, 등재지인 학회 학술지 정책개발연구의 질적 수준향상 등에 있다. 물론 관련 타 학회, 대학, 연구소 등과의 교류증진, 공동학술대회 개최 등 양적, 질적 발전도 강구해 나갈 계획이다.”

이렇게 자신의 행보를 설명하는 중에 갑자기 그의 작은 눈이 웃음으로 실눈이 되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인으로 거듭난 일이 무엇보다 행복했다고 했다. “문학의 등단은 정말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시조문학의 시조시인으로 등단했다. 작품집으로 ‘전설, 초록별있다. 그리고 수필집으로는 ’향기로운 나무는 저절로 향기가 난다.‘ 가 있고 ’발바닥으로 사유하는 철학‘ 을 집필 중에 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작품을 빨리 써내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가 글을 쓰는 공간은 출퇴근을 이용한 지하철 안이었다. 그만큼 그 안에 시어가 농축되었다는 뜻일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릴 적 가난이 시인이 된 계기였다

“소년시절 가난이 날 사유하게 했다. 즉, 가난이 글쓰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별히 할 일 없는 소년이 뒷동산에 올라 산국화, 솔향기에 젖어 물총새, 따오기, 개울가의 피라미, 물잠자리 등을 친구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 도서실에 있는 명작, 동화, 위인전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길거리에 찢어진 신문까지도 주워 읽어댔다. 당시 동네에 유일한 “문화당”이라는 서점이 있었는데 난 그곳의 시집도 읽었다. 그때 읽었던 시는 지금도 암송하고 있다. 아마도 30여 편은 될 것 같다.”

어릴 적 가난이 시인의 계기가 되었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 중 장수하늘소의 전설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의 자전적인 인생관이 담겨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는 스스로를 “전설을 만드는 사람”이라 표현하고 있으니. 그의 카톡에도 “나는 천년 전설을 꿈꾼다”가 대문으로 설정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연구실의 건물명도 ‘장수하늘소의 전설’이다. 그가 이처럼 장수하늘소의 전설에 특별한 애착을 갖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했다.

“가난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서울에 올라오던 해, 나는 완행열차 안에서 “나의 신화를 창조하자. 나의 전설을 만들자.”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평생 그 글을 책상에 붙여놓고 생활해 왔다. 아직도 나의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청소년들의 삶에 모델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다. 그것이 나의 진정한 전설의 완성이다.”

이처럼 끊임없는 노력으로 신화창조의 주인공이 된 그는 “운명은 없다.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를 평소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이제 그는 또 하나의 운명을 만들어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의 박물관 설립이다.

앞으로 박물관을 설립할 것이다

“서울시에 있을 때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1년간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민속유물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 식견과 관심으로 민속품들을 40여 년 전부터 수집을 해왔다. 지금 컬렉션이 상당히 모아졌다.

조선시대 관료의 틀에서 벗어나 해주, 회령, 양구 등 지방을 중심으로 꽃피운 자유분방한 영혼으로 빗은 항아리, 떡살·바디·북. 또 짐바브웨 소냐조각, 가나·가봉·말리 등의 마스크, 아프리카의 원시예술이 꿈틀대는 작품 등.

난 이것들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생각이다. 즉, 박물관을 오픈 할 계획이다. 이순이 넘은 나이에 또 하나의 꿈을 이룬다는 것은 정말 신의 축복이고 행복한 일이다.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신의 축복을 기다려라’ 는 영국의 격언이 있다. 나는 나의 전설의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신의 축복을 기다릴 것이다.

건강을 위해 '만만세 플랜'을 실천한다   

왜소한 체구에도 결코 작아 보이지 않은 작은 거인에게 마지막 질문으로 건강의 비결을 물었다.

“특별한 것은 없다. 차를 버리고 걷는다. 아침 6시 일어나 디엠시에서 한강난지천공원까지 약 8km를 걷는다. 기본적으로 1만보 이상을 걸어야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 한다. 이렇게 걷는 것을 “만만세 플랜” 이라 명명하고 날마다 실천하고 있다.

27년 5개월(1만일) 동안 매일 1만1천보(1천보는 십일조) 이상 걷고 그 실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기록이 완성되었을 때 기네스북에 등재를 추진할 생각이다. 2017년 2월 말 현재 1,509일(약 4년 2개월)째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다.

그동안 총 걸음 수는 24,913,035걸음, 19,111km이다. 하루 평균 12.7km이다. 약 4년 만에 지구의 약 반 바퀴를 걷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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