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기억력이 좋지 못한 형편이지만, 살면서 잊지 않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번호가 세 개쯤은 있다. 주민등록번호와 학번과 군번 말이다. 또 그 숫자들만큼이나 학창시절 또렷이 가슴에 남은 문장들도 있다. 우중충한 청춘에 잠시 볕이 들게 한 그런 문장들.

위편삼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읽고 듣기로 따지면 칸트의 정언명령이 주민등록번호면, 니체는 학번쯤, 임제 선사의 할(喝)은 군번쯤 될까. 대학을 졸업하고는 잊고 지냈던 문장들이다. 최근까지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

이마누엘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 나오는 정언명령이다. 18세기 프로이센에서 태어난 철학자 칸트는 선의지(善意志)를 기초로 한 도덕 행위만이 진정으로 선하다고 봤다. 어떤 사람의 성향이 착해서 누군가를 돕는 건 진정한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사람의 타고난 성향이 좋든 나쁘든, 상황이 어떻든, 선의지를 기초로 한 행위만이 도덕적이다. “나는 타고난 성격이 모질고 네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네가 죽을 만큼 밉지만, 너를 돕는 게 도덕적으로 옳으니까 너를 물에서 건져 줄게”라는 식이다.

최근 다시 이 문장이 새삼스레 떠오른 것은 기자가 출입하고 있는 한국도로공사 때문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지난 4월 16일 기자가 <김진숙 도로공사 사장 “스마트톨링 도입”...4천 요금수납원 어쩌나>라는 기사를 쓴 뒤로, 도로공사 관계자 누군가가 기자를 출입기자 목록에서 ‘삭제’했다. 도로공사가 추진하려고 하는 정책에 대한 우려를 담은 기사를 쓴 뒤로 보도자료 수신이 정지된 것이다.

4월 16일은 기자의 생일이기도 하다. 기자가 출생한 생일날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기자를 삭제했다는 사실은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공손룡의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만큼이나 모순적이고 사려 깊은 고민을 요구하는 지점이었다. 

기자는 지난 1일 한국도로공사에 <한국도로공사 자회사, 코로나19 확산 속 승진 시험 강행 논란> 기사의 취재를 위해 전화를 했다. 본 취재가 끝난 뒤 “요즘 도로공사의 보도자료가 오지 않는다”고 하자 도로공사 관계자는 “서버 등의 문제로 저절로 삭제되지는 않는다”며 “내가 삭제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삭제했을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후 기자는 “일단 출입등록을 다시 하고 누가 왜 삭제했는지 알고 싶다”고 “비판적인 기사에 팩트가 아닌 부분이나 오류가 있었다면 자료를 주고 피드백을 주는 게 우선이지, 차단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물었다.

이에 도로공사 관계자는 “출입등록을 다시 했고 보도자료 수신이 가능할 것”이라며 “누가 출입 목록에서 삭제했는지는 알아는 보겠지만, 사실상 알기가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 관계자는 피드백 부분에 대해서는 오랜 침묵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이날 이후 나흘이 지났지만, 해당 관계자는 왜, 그리고 누가 기자를 출입 목록에서 삭제했는지에 대한 답변은 주지 않았다. 이후에도 도로공사의 보도자료가 오지 않고 있음은 물론이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정언명령을 설명하면서 대표적인 네 가지 선하지 않은 사례를 든다. △자살 △거짓말 △게으름 △타인에 대한 의무 회피 등이다.

자살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면, 생존하고 번영하려는 자연의 의지에 반하기 때문에 선하지 않다. 거짓말도 보편화 되면 약속의 의미가 없어져 사회에 믿음이 없어지는 까닭에 나쁘다. 게으름과 의무 회피 등도 마찬가지 원리다.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는 행위, 누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은 제1조에 “이 법은 공공기관의 경영을 합리화하고 운영의 투명성을 제고함으로써 공공기관의 대국민 서비스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정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존재 이유가 대국민 서비스 증진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공공기관이 자신을 향한 비판에 귀 닫고 눈 감고, 회피하는 것을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삼는다면, 공공기관의 존재 이유인 대국민 서비스 증진을 할 수 없을 테다. 한국도로공사는 칸트가 언급한 선하지 않은 사례 가운데 어떤 항목들에 해당할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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