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 밖의 가족’ 인정하는 ‘생활동반자법’
- 1인·고령가구 돌봄공백 해법으로 떠올라
- ‘결혼은 사회적 의무 아닌 개인의 선택’ 인식
- 변화 수용해 제도 밖 ‘돌봄의 자유’ 논의 필요

프랑스의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는 일찍이 “2030년이면 결혼제도가 사라지고 90%가 동거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인류학자 헬렌 피셔도 “과거 1만 년보다 최근 100년간 결혼 관습이 더 변화했다. 이 같은 추세로 볼 때 앞으로의 변화는 더욱 극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학자들의 분석이나 전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결혼과 동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이 2018년 실시한 사회조사에서 ‘동거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56.4%로 처음으로 절반을 넘었고, 이 중 20대는 74%에 달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법과 제도는 아직도 혼인과 혈연으로 맺어진 전통적인 형태만을 ‘정상 가족’으로 정의하며 이 틀 안에서만 전개되고 있다. 날로 늘고 있는 비혼·동거 가족 등 제도권 밖에 있는 소외된 이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헌법은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인 ‘행복추구권’을 명시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동반자와 관련된 제도는 ‘결혼’ 뿐이다. 단 하나의 선택지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행복은 소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개개인의 현실과 욕구를 담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규범이 현실에 맞게 개선될 수 있도록 <뉴스포스트>는 3부에 걸쳐 한국 사회 결혼 제도의 현주소와 대안에 대해 살펴본다. 1편에서는 ‘결혼 제도’의 한계와 대안이 필요한 이유들을 짚어본다. 2부에서는 ‘외롭지 않을 권리’의 저자 황두영 작가와 만나 결혼 제도의 대안인 ‘생활동반자법’에 알아보고, 3부에서는 동반자법이 필요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이해리 기자] 여고 동창생인 60대 A 씨와 B 씨는 40년간 부산에서 동거해왔다. 함께 살던 아파트는 함께 돈을 모아 마련한 재산이었지만 A 씨의 명의로 돼 있었다. 2013년 8월 A 씨는 골수암 판정을 받았고, 투병 과정에서 A 씨의 법적상속인 조카가 나타나 B 씨를 집에서 쫓아내고 간병하는 것도 막았다. 거리를 전전하던 B 씨는 뒤늦게 A 씨의 죽음을 알게 됐고, 신변을 비관해 그 해 10월 20층 아파트 꼭대기에 올라가 투신자살했다. 

서울 영등포 쪽방촌 앞 한 노숙인이 막걸리를 마시며 앉아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해리 기자)
서울 영등포 쪽방촌 앞 한 노숙인이 막걸리를 마시며 앉아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해리 기자)

제도 밖 ‘동거인’이 받는 피해

한국에서는 법률상 가족이 아닌 사람과 살기 어렵다. 친구와 함께 사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지만 국가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여자와 남자의 그리고 그들의 자녀라고 정의된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정상 가족’을 전제로 복지 제도를 펼친다.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한 부부가 아니면 국가 정책 지원 대상에서 빠진다. 고용·건강보험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없고, 응급수술이 필요할 때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할 수도 없다. 출산하거나 아팠을 때 쓸 수 있는 출산 휴가와  돌봄 휴가도 주어지지 않는다.

일상을 들여다보면 더 문제가 많다. 부양할 가족이 아님으로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없고, 특히 주택 공급 정책도 신혼부부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동거 가족은 혜택을 받기 힘들다. 하다못해 가족끼리 가능한 휴대폰 할인, 항공사 마일리지 공유도 되지 않는다. 단순히 법적인 관계가 증명이 되지 않아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많다. 노인과 저소득층, 장애인 등 취약계층으로 갈수록 심각하다.

단순히 법적인 관계가 증명이 되지 않아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많다. 고령층과 저소득층, 장애인 등 취약계층으로 갈수록 심각하다.

올해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 수는 812만 5,000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15.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픽사베이)
올해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 수는 812만 5,000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15.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픽사베이)

재혼 대신 동거 택하는 ‘황혼 로맨스’

# 10여 년 전 부인과 사별한 A 씨(68)는 재작년 지자체가 주최한 실버 미팅에서 만난 B 씨(65)와 1년째 동거를 하고 있다. 최근 재혼을 원한다고 자녀들에게 얘기를 꺼냈지만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애초에 혼자였기에 동거는 문제없지만 호적, 부양, 유산 등의 문제로 세 명의 자녀들이 반대에 나선 것. A 씨 커플은 괜히 자녀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결국 재혼을 포기했다. 

우리나라 고령층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00년 521만 2,000명이던 60세 이상 인구는 2017년 1024만 5,0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올해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 수는 812만 5,000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15.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층의 이성 교제에 대한 시선이 개방적으로 변하고, 과거에 비해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여유를 찾으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인생 제2막 ‘황혼 로맨스’가 뜨겁다. 하지만 A 씨 커플과 같이 재산 분할 등 이해관계로 다소 부담스러운 재혼 대신 황혼 동거를 택한 이들이 많다. 재혼은 법률혼으로 유산을 둘러싼 갈등이 예상되기 때문에 결혼까지 이어지기는 어렵다. 

노인이 되면 병원에 갈 일도 많고 노인복지시설 등 행정기관에 도움을 받을 일이 많다. 가족이 서류를 대신 신청하거나, 긴급수술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동거인은 아무런 결정 권한이 없다. 

장애인의 결혼과 복지 혜택

# 장애인 C 씨(50)는 동갑내기 비장애인 남자와 7년째 동거를 하고 있었다. C 씨는 기초 수급을 유지하기 위해 주민등록에 동거인을 올리지 않았다. 동거인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C 씨는 법적으로 아무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동거인의 형제들에게 밀려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 

장애인에게 같이 살 사람을 찾는 것은 생존의 문제다. 장애인 커플의 경우는 1인 가구로서 복지 혜택과 부부로서의 혜택을 고민하면서 혼인신고를 해야 할지 고민한다. 

실제로 가족이 아닌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경우는 드물다. 국민의 삶에 있어서 제도가 다양한 선택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 금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혈연과 결혼에 의한 제한적인 가족 구성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행하기 어려운 방식일 수 있다. 

지난해 개봉한 ‘나의 특별한 형제’라는 영화가 있다. 2살 때 척추를 다쳐 전신마비 지체장애인 형과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진 지적장애인 동생이 주인공이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형은 지적장애인의 머리 역할을 하고, 반대로 동생은 형의 손과 발 역할을 하며 함께한다. 영화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돌봄’의 형태를 보여주며 생활동반자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활동반자법은 반드시 혈연 또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로 묶이지 않아도 서로의 생활에 의무와 권리를 가지는 ‘동반자’와의 법적 관계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독자 제공)

결혼 제도의 대안 ‘생활동반자법’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법안이 ‘생활동반자법(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이다. 혼인이나 혈연이 아닌 사이에서도 서로 돌보며 함께 살아가기로 법적으로 약정한다면, 일정한 대리권과 복지 혜택을 부여하자는 내용이다. 

19대 국회에서 당시 진선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추진했으나, 동성 결혼의 법제화를 반대하고 기존 가족 제도를 위협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로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이 법안의 목적은 동성결혼 합법화 보다는 ‘결혼제도와 생활동반자법과의 공존을 통한 돌봄 공백 해소’이다.  돌봄은 같이 살 동반자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우리 사회는 한가지 방식으로만 접근하고 있다는 것.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생활동반자법과 유사한 내용의 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1999년 결혼을 대체할 수 있는 팍스(PACS)라는 제도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두 성인 간의 계약을 통해 결혼한 부부와 유사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했다. 동거 가구에도 가정 수당을 주고, 동거 관계에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철저히 금지해 출산율 반등에 성공했다.   

스웨덴에는 ‘삼보’라는 제도가 있다. 스웨덴어로 ‘삼만보엔데(Sammanboende)’, 함께 산다는 의미다. 동거 파트너가 법적인 보호자에 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영국은 2018년 영국은 외로움이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는 것만큼 건강에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외로움위원회’를 구성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저출산, 고독사, 돌봄 공백, 사회복지 비용 증대 등이 국가적 문제로 떠오른다는 것은 이와 관련된 법과 행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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