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백기완 영결식 엄수...시민사회계 인사 모여
독재 시절부터 현 정권까지...평생 약자 곁에서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일생을 민주화와 민족, 인권, 노동, 통일 등 사회 운동에 매진했던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재야의 큰 어른이자 민중의 벗이었던 고인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노나메기 세상(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모두가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으로 떠났다.
19일 이날 오전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운구 차량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을 나왔다. 대학로에서 노제를 진행한 후 운구 행렬은 종로5가 등을 거쳐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시청 광장으로 향했다. 운구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기온은 영하권에서 영상권으로 빠르게 올랐다.
풍물패와 노동조합원, 빈민·장애인·역사 연구 단체 관계자, 세월호 참사 유가족 등 약 300명이 운구 행렬을 메웠다. 고인이 평생을 민주화와 인권, 노동, 통일 등 사회 운동에 매진했던 만큼 다양한 시민사회계 인사들이 모였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운구 행렬은 중간중간 거리를 띄운 채 행진했다. 경찰은 행진이 이어질 동안 운구 행렬과 통행 차량 사이를 중재했다.
민족 문화 부흥 운동에도 힘썼던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운구 행렬에 다양한 전통문화를 재현했다. 꽃상여와 소리꾼들의 창, 한복 차림의 생전 모습을 담은 구조물들이 줄을 이었다. 백 소장이 꿈꿨던 ‘노나메기 세상’은 운구 행렬 인파의 마스크와 구조물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취재진들은 물론 인근 시민들까지 카메라로 운구 행렬을 촬영하기 바빴다.
약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운구 행렬은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 중구 시청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인근에서는 발열 검사가 진행됐고, 광장 내 좌석은 사회적 거리두기 준수를 위해 간격을 띄웠다. 코로나19가 지속하는 상황에서 영결식의 풍경은 예년과 달랐지만, 감염병의 공포도 추모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고인을 추모하려는 정치·사회계 인사들과 일반 시민들이 한데 모였다.
재야의 큰 어른 떠나다
영결식에서는 고인의 생전 약력이 소개됐다. 1932년 일제강점기 당시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백 소장은 해방 이후 남한으로 이주했다. 해방과 전쟁으로 요동치던 사회에서 통일과 민족 문제에 눈 뜬 백 소장은 1964년 일본과의 불합리한 국교정상화에 항의하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투신하며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에 나섰다.
군사 독재 정권 치하에서 백 소장은 민족·민주화·통일 운동 등에 종사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개정 청원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고, 1979년 대통령 간선제 시행 저지를 위한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잔혹한 고문까지 더해져 체중이 38kg까지 주는 등 건강이 악화됐다.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다. 1983년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과 1985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지내는 등 통일 운동에 적극 나섰던 백 소장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당의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후보를 사퇴했고,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정계에서 물러난 백 소장은 진보적 노동 운동에도 헌신했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을 지냈고, 2000년대 들어서서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투병으로 병상에 누워있었음에도 그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을 응원하는 문구를 남겼다고 전해졌다.
군사 독재 시절부터 현 정권까지 사회적 약자가 있던 자리에 늘 함께 했던 백 소장은 우리말 쓰기 운동에도 헌신했다. 지금은 대중화된 ‘동아리’와 ‘달동네’, ‘새내기’라는 단어는 백 소장을 통해 탄생했다. 또한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백기완의 통일이야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 저술 활동도 병행했다.
백 소장과 함께 평생을 사회 운동에 헌신한 문정현 신부는 영결식에서 “용산 참사, 세월호, 백남기 농민, 노동자와 농민·빈민 편에 서서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노나메기 세상에 대한 말씀이 길이 남을 것”이라며 “앞서서 나아가셨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 다시 만나 뵐 그날까지 선생님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전했다.
한편 지난 15일 투병 끝에 향년 89세로 별세한 백 소장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이날까지 5일간 치러졌다. 영결식이 끝난 후 고인은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돼 영면에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