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기업결합 조건부 승인
‘운수권·공항슬롯’ 재분배 시행조치 지시...실효성 의문
김강식 한국항공대 교수 “공정위 시행조치, 외국 항공사만 배불려”
류재영 한양대학교 교수 “독과점 틀 버려야...‘메가 캐리어’ 글로벌 흐름”
[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공정거래위원회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조건부 승인한 것을 두고 실효성이 없는 조치라는 지적과 함께, 글로벌 ‘메가 캐리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결정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는 대한항공에 공항슬롯 반납 등을 강제할 방안이 없는 데다, 장거리 노선은 반납한다고 해도 인수할 여력이 있는 국내 항공사가 없기 때문에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반면 항공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공정위의 결정이 국내 항공산업 발전을 위한 ‘메가 캐리어’ 탄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고 있다.
공정위가 1년여의 기간 동안 고심을 거듭한 뒤에도 독과점 우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데다, 되려 항공산업 발전을 위한 ‘메가 캐리어’ 탄생의 발목만 잡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공정위, 운수권 재분배와 공항슬롯 반납 등 시행조치 주문
정부는 지난 2020년 말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라는 방침을 전했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 등은 지난해 1월 기업결합을 신고했다. 하지만 양사 합병에 따른 일자리 위협과 독과점으로 인한 가격인상 가능성 등의 우려로, 공정위는 1년여 기간 동안 심사를 미뤄왔다.
공정위는 지난달 29일에야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기업결합을 조건부 승인했다. 이날 고병희 공정위 시장구조개선정책관은 정부세종청사에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기업결합 심사 결과 일부를 발표했다.
공정위는 대한항공 등에 합병을 위해선 △운항 횟수가 제한된 항공비자유화 노선의 운수권 재분배 △국내 공항슬롯 반납 △운임 인상 제한 등의 시정조치를 이행하라고 지시했다. 외국 공항슬롯은 국토교통부와 협의해 이전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노선 운수권과 공항슬롯을 재배정하는 구조적 조치는 물론, 기업결합 이후 운임 가격 인상을 일정 기간 제한하는 행태적 조치도 병행한다는 설명이다. 공정위는 대한항공 등이 운수권과 슬롯 반납 등 구조적 조치를 기한 내에 준수하지 못하면, 해당 기간에 행태적 조치를 적용한다는 입장이다.
대한항공 등이 구조적 조치를 이행하지 못하거나, 이행하지 않으면 행태적 조치만 일정 기간 준수하면 정부의 독과점 방지조치가 끝날 수 있는 것이다.
공정위는 이달 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해당 시행조치 이행 조건으로 양사의 기업결합을 승인하는 내용의 심사보고서를 전원회의에서 의결할 예정이다. 공정위 의결 이후 미국과 EU, 중국, 일본 등 해외 경쟁당국의 심사가 완료되면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의 주식을 취득해 기업결합을 완료하게 된다.
항공업계 “외국 항공사에 국부 유출”, 시민단체 “독과점 대안 없어”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공정위의 결정을 한목소리로 성토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결합 뒤 독과점을 막을 실효성 있는 조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시민사회계는 공정위가 이번 결정을 철회하고, 기업결합을 불허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실제 인천에서 출발하는 LA와 뉴욕, 시카고, 시드니, 바르셀로나 등 7개 인기 노선은 기업결합 이후 대한항공의 점유율이 100%거나 100%에 수렴하는 수준이 된다. 국제노선 전체로 봐도 양사 통합 시 점유율이 50% 이상되는 노선은 전체 노선 143개 가운데 32개 노선에 달한다는 점에서 독과점 가능성이 높다.
국내에서 장거리 노선을 운행할 수 있는 항공사는 사실상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유일한 까닭에, 대한항공이 운수권과 슬롯을 반납한다고 해서 인수할 수 있는 국내 항공사도 전무한 형편이다.
참여연대는 지난 4일 논평을 통해 “공정위로서 독점 폐해를 방지할 수 있는 확실한 담보책이 마련되지 않은 이상 불허해야 한다”며 “슬롯 반납이나 이전 등 조건은 일시적이고 실효성 없는 대책에 불과하기 때문에, 재벌 그룹에 막대한 독점이윤을 보장하는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단거리 노선은 LCC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의 기존 노선을 인수하면 독점이 해소될 수도 있지만, 이미 진에어,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 주요 LCC 3사가 두 회사의 계열사인 상황”이라며 “주요 LCC 3사의 매각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한 국내 항공업계의 독과점을 해소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반면, 공정위가 밝힌 조건부 승인에 대해 항공업계 전문가들은 외국 항공사에 국부를 유출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시민사회 단체가 주장하는 실효성 있는 제재의 필요성 대신, 오히려 글로벌 흐름인 ‘메가 캐리어’ 탄생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새로운 항공산업 발전을 이뤄내야 한다는 분석이다.
김강식 한국항공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7일 뉴스포스트와의 통화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반납한 운수권이나 공항슬롯을 인수할 국내 항공사는 LCC만 남는데, 현실적으로 LCC들은 미국이나 유럽 등 장거리 노선을 대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서 “결국 우리나라 미주 노선이나 유럽 노선 등 이른바 ‘황금 노선’을 탐내는 외국 항공사들의 배만 불릴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어 “운수권이나 슬롯 반납은 생산공장에서 생산라인을 축소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공정위의 시행조치가 대한항공의 인력 구조조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건 자명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연감소분 대비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명예퇴직 제도 시행, 계약직 근로자들과 재계약을 하지 않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력 구조조정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류재영 한양대학교 교통·물류공학과 교수는 “항공산업은 국력과 직결되는 국가기간산업인 까닭에, 단순히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합병돼 재벌의 독과점이 우려된다는 시각으로 보면 안 된다”며 “현대차와 기아차가 결합해 세계 시장에서 선전하고, 모빌리티 기업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항공산업 기업결합도 같은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이어 “이번 공정위의 결정은 ‘메가 캐리어’로 항공산업이 재편되는 글로벌 흐름을 보지 못한 국내용 결정”이라면서 “공정위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현재의 항공산업 위기와 미래 항공산업 재편에 대해서 얼마나 책임 있는 판단을 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기간산업이라는 항공분야 특성과 중요성을 인식해 독과점이라는 기존 틀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새로운 항공산업 발전을 이뤄내도록 정부 차원의 전략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