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운 칼럼니스트
온기운 칼럼니스트

[뉴스포스트 전문가 칼럼=온기운] 세계 반도체 전쟁이 ‘민족주의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과 중국 대만 일본 유럽연합(EU)이 서로 반도체 산업을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상대국 견제와 독자 기술기반 구축에 필사적으로 나서고 있다.

사활을 건 치열한 패권 싸움

반도체는 미사일 등 군수 산업이나 우주항공 산업 등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자동차나 전자 정보통신(ICT) 등 민생용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본래 수송기계인 자동차는 전기자동차나 자율주행차로의 이행이 진전됨에 따라 전장 부품 수요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 결과 자동차 산업은 최근의 반도체 부족 상황에서 전자 ICT 등 다른 산업들과 물량 확보 쟁탈전을 벌이는 사태에 이르렀으며, 물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반도체를 적기에 확보하지 못하면 자국 산업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각국이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최첨단 반도체 시설 구축과 10년간 운용비용(평균 400억달러)에 대한 재정자금 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반도체생산촉진법(CHIPS for America Act)을 성사시킨 미국 조 바이든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반도체 자립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지난 2월 24일(현지 시간)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바이오의약품 등 4개 품목에 대해 100일간 공급망 조사를 지시하는 행정명령 14017호에 전격 서명했다. 주요 전략 산업에서 중국 견제와 국내 공급사슬 구축이라는 전략 목표 달성을 위한 일종의 포석이다.

지난 4월 12일에는 19개 글로벌 반도체·자동차·IT 기업 경영진들과 가진 화상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소재인 웨이퍼를 손에 들고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미국 내 반도체 산업을 강화할 것인지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반도체가 바로 인프라이며, 우리는 과거의 인프라를 수리하는 게 아니라 오늘의 인프라를 구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도체를 인프라의 핵심으로 정해 공격적인 투자를 하겠다는 의지다.

미국의 위기 의식과 대중국 공세 강화

사실 미국의 반도체 생산 비중은 13%에 불과하며, 72%의 생산력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과 대만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 집중돼 있다. 중국 정부는 2015년 ‘반도체 굴기’를 표방하며, 중장기적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선도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막대한 정책자금 투입과 인력 양성, 해외기업 인수·합병(M&A)을 서두르고 있다. 수입에 의존하는 반도체 자급률 목표를 2020년 40%, 2025년 70%로 정했다. 지난해 자급률은 15.9%로 목표에 미달했지만 4차 산업혁명 주도권 확보 등을 위해 반도체산업 육성 노력은 지속적으로 기울일 전망이다. 이미 팹리스(Fabless: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는 중국이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해 한국을 따돌릴 정도가 됐다.

2017년 1월에 발간된 미국의 대통령 직속 과학기술자문회(PCAST) 보고서는 중국의 반도체 산업 부상이 미국의 경쟁력 약화 요인일 뿐 아니라 심대한 국가안보 위기임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트럼프 정부 당시에도 대중국 무역협상 압박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 기업에 대한 수출입 및 증권투자 금지 등 초강력 대응을 담은 다수의 행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 기를 꺾기 위한 공세를 보다 노골적으로 펼치고 있다. 중국의 화웨이와 최대 파운드리 생산업체인 SMIC를 국방수권법에 따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한편, 반도체 장비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동맹국 기업으로 여기는 삼성전자나 대만의 TSMC 등에 대해서는 미국내 투자를 늘리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 인텔은 독자적으로 시스템 반도체 생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국제협력은 약화되고 각자도생 모색

미국의 공세에 중국도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 않다. 중국은 작금의 반도체 수급난이 화웨이등 자국기업을 제재한 미국 정부 탓이라고 비난하면서 반도체의 최대 수요자인 자국에 한국 일본 등의 업체가 반도체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술전수와 국내 생산능력 확대 차원에서 외국 기업에 대해 투자확대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터라, 중국 정부는 언제든지 이들 기업에 생산능력 확충을 위한 투자를 요구할 수 있다.

파운드리 분야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대만은 향후 3년간 1천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대만의 파운드리 생산능력은 전세계의 60% 이상이다. 최대 파운드리 생산업체인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350억달러 규모의 최신 팹 공정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제조 장치나 재료에 강하지만 반도체 칩에서는 경쟁국에 뒤지는 처지가 됐다. 일찍이 정부가 D램 생산에서 시스템LSI로 산업구조를 전환하는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988년 50.3%에서 2019년에는 10%로 떨어졌다. 일본의 3대 반도체 대기업인 ‘키옥시아·소니세미컨덕터솔루션·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 중 키옥시아와 소니만 전통적인 대량생산품인 메모리와 CMOS(상보형 금속산화 반도체) 이미지센서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르네사스는 시스템LSI(SoC)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의 세계 반도체 패권 경쟁 상황에서 위기감은 갖고 오는 5월까지 반도체 산업 강화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유럽도 아시아 파운드리 업체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이 최대 600억유로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EU는 현재 10%인 세계시장 점유율을 20%로 높인다는 목표를 정했다.

한국, 반도체 전쟁 살아남기 위해 기업과 정부가 밀접히 협력해야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초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이 오너 경영의 장점인 스피드 경영을 구사해 D램 분야에 선제적 투자 결단을 내림으로써 오늘날 세계 1위 메모리 생산의 권좌에 오르게 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수년간 ‘무어의 법칙’을 깨고 매년 반도체 칩 집적도를 두 배로 늘리는 기염을 토하는 등 세계가 주목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 반도체 생산은 원래 삼성전자와 LG반도체, 현대전자의 3강 구도로 돼 있었으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정부의 ‘빅딜’ 방침에 따라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합병해 하이닉스반도체로 거듭났다. 그러나 하이닉스는 한동안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회생마저 불투명한 위기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2012년 기사회생한 하이닉스를 SK텔레콤이 인수해 SK하이닉스로 사명을 바꾼 후 상황은 크게 호전돼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양강 구도로 됐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한국 업체들이 최강자이지만,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약자다. 비메모리 반도체 위탁생산에서는 TSMC가 점유율 55%로 압도적인 1위이며, 삼성전자는 16%대로 2위다. 자동차용 시스템 반도체 점유율은 2%에 불과하다.

삼성이 평택에 비베모리 반도체 생산라인을 늘리며 TSMC를 추격하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반도체 장비와 원료 분야에 취약한 것도 한국의 약점이다. 갈수록 시장이 커지는 시스템 반도체를 강화하지 않고 메모리 반도체에만 편중된 불균형적 구조로는 미래 세계 반도체 시장의 강자가 될 수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미국이 중국에 공격의 포화를 집중시키고 있지만 그 포화가 언제 우리에게 향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의 반도체 전쟁이 민족주의에 입각한 내셔널리즘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쌀’인 반도체는 식량이나 에너지와 같이 안보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러기에 기업에만 맡길 게 아니라 기업과 정부가 2인 삼각적 협력관계를 구축해 세계 시장 변화의 파고를 넘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어떤가. 안타깝게도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구치소 수감으로 오너십에 입각한 스피드 경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가 반도체 업계와 머리를 맞대고 작금의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은 오로지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주요국들의 정치 지도자와 정부가 나서서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을 짜고 있는 모습을 직시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프로필-

▲ 일본 고베대 경제학 박사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 
▲정부정책 평가위원
▲국가경쟁력분석협의회 위원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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