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현동의 집 뒤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김창자 할머니 부부 (사진= 신현지 기자)

[뉴스포스트=신현지 기자] 서대문의 경기대학교 정문을 지나 언덕배기로 오르다 보면 반듯한 빌딩숲 사이로 낡고 빛바랜 주택들이 마치 70년대 사진첩에서라도 튀어나오듯 자리한 것을 보게 된다.

낮은 처마와 그것들이 서로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담벼락 사이로 가파른 계단 역시도 옛 드라마에서나 봤음직한 낙후 된 모습들이다. 그런데 그 낡고 초라한 모습들이 왠지 누추하지 않고 친근하다. 낮은 담 아래로 들여다보이는 비좁은 안마당이며 마당 한 구석의 늙은 감나무 가지에 붙잡아 맨 빨랫줄 역시도 기억 속 낯익은 모습이라 반갑기 조차하다.

더욱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배기에 마치 시골 들녘에라도 선 듯 온통 푸성귀 밭이라 아직도 서울 복판에 이런 곳이 있나 눈이 휘둥그레진다.

북아현동의 40년 지킴이 김창자 할머니 부부(사진=신현지 기자)

 

다름 아닌 서대문구 북아현동 재정비 촉진지구 3구역이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면 1971년 김현옥 시장의 지시에 의해 건립된 금화시범아파트가 서 있던 바로 그 동네다. 그렇지만 지금은 금화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철조망이 빙 둘려 쳐져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금화시범아파트는 당시의 무허가 철거민들을 위해 총 447동으로, 요즘 아파트 건축 양식과는 달리 기둥과 보, 슬라브 구조로 내부 구조 변경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고 한다.

북아현동(사진=신현지 기자)

대부분 개별 연탄 난방에 세면장과 화장실은 각 층당 공동으로 쓰게 되어 지금의 아파트와 비교해 보면 상상도 못할 구조였고. 그런데도 당시 금화시범아파트는 대부분 중산층이 입주자들로 냉천동의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철거민에 맞춰 설계된 아파트였기에 하중을 받는 중량문제로 자주 사고가 발생하곤 했으며 또 아파트를 지은 곳이 산중턱이라. 왜 하필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사람들의 질타에 당시 김현옥 시장은 "야 이 X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라고 했다고 하니.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말이라 이 말은 믿거나말거나 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금화시범아파트가 철거(2015년) 된 자리에 철조망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그곳을 돌아 나오자 중턱에 텃밭을 일구는 두 노부부가 가뭄에 타들어가는 채소밭에 물을 뿌리다 그늘에 잠시 쉬는 모습이다.

이곳 북아현동에 터를 잡고 산지 40년이 넘는 노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정다워 보인다. 아들 넷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부부만이 남아 집 뒤의 텃밭을 일군다는 이들은 이렇게 사는 것에 특별한 불편함은 없다고. 오히려 텃밭에 푸성귀라도 가꾸면서 사는 게 낙이라고 한다. <뉴스포스트>는 그 두 사람과 잠시 시간을 같이 하기로 했다.

북아현동에서 내려다 본 서대문의 모습(사진=신현지 기자)

그들의 말인 즉, 이곳 아현은 조선시대 애오개라고 불렸는데 이는 아이고개가 있던 데서 유래 되었다는 설과 어린이가 죽으면 내다 버리던 고개라고 했다는 두 가지 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중구 만리동 큰고개(만리재)보다 작은 고개이므로 아이고개라고 한 것을 한자명으로 아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고갯마루가 높았기 때문에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오르내렸기 때문에 애오개 라고 불렸다는 설 등이 이 동네의 지명에 얽인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은 1944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신촌로를 경계로 안산자락에 위치한 북쪽은 북아현, 남쪽은 아현으로 지명이 갈리면서 북아현은 서대문구에 아현은 마포구에 속하게 된 것이란다.

한편, 이곳 북아현은 아현, 충정로와 함께 6.25전쟁 직후에 급속한 서울 중심지로 급부상했는데 이는 1945년 광복 후 서울의 주요 서민촌에 이어 6.25 전쟁 직후 피난민들의 하나 둘씩 모여들어 언덕에 판자집을 형성해 인구의 증가를 넓혔다. 그리고 6-70년대 산업화 물결이 밀려오면서 북아현은 눈에띄게 급성장했다.  즉, 고향을 떠나 서울역에 내린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아와 방을 구한 곳이 북아현이었던 것이니.

또 주변에 대학가들이 많아 젊은층의 유입은 북아현은 한층 더 활기 찬 지역으로 형성하는데 커다란 일조였다. 하지만 현재는 금화시범아파트 철거(2015년) 와 또 재정비 촉진지구로 옛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진= 신현지 기자)

김창자 할머니 부부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슬며시 다가 앉은 82세의 김이쁜 할머니는 그간 시집 와 여태 이 동네를 지켰다며 동네가 재개발지역으로 묶이면서 어수선해졌다고 했다. 하루 빨리 아파트가 들어서든 공원이 만들어지든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즉, 이곳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설 구청의 입장에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해 그것의 해결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듯, 할머니는 언제 재개발을 하게 될지 집수리도 못하고 그렇다고 옛집 그대로 살자니 불편하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이 동네를 떠나는 이유라고 했다.  

하지만 텃밭에 물을 주느라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나온 박창자 할머니 부부는 "언제 비가 내려 줄지 올해 같아서는 수도세가 비싸 상추도 못 길러먹겠다"며  하늘에 원망을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텃밭 가장 자리에 빗물을 위해 준비한 고무통들이 바싹 말라있었다.

그러니까 서울 중심 북아현동에 비를 기다리는 농심이 있다는 것에 내심 흐뭇한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니,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 텃밭을 일구는 동네가 남아 있다는 것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울에 마지막 남은 달동네에 은근히 마음이 끌리는 것 역시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듯 가파른 동네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미는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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