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0~30대 여성 11인 인터뷰
경제·정책·문화·환경 등 전 사회적 변화 必
"정책만큼 중요한 건 성평등 문화 조성"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생 국가다.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동향조사 출생·사망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인구 유지선인 2.1명의 3분의 1 수준이다. 출생률 저하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고령화 현상이 지속되고, 국력 역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기업 등 민간에서도 각종 대책이 나오고 있다. 저출생 대응 관련 예산은 1년에 못해도 수십조원 규모로 집계됐고, 각종 대출 혜택과 현금 지원 등 선심성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아이를 출산할 시 수억원에 달하는 지원금을 주겠다고도 한다.
하지만 출생률 반등 소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정부와 지차체, 기업 등이 내놓는 저출생 대책들이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여성 당사자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것이다. 저출생 정책 대상자는 젊은 층 여성들이지만, 정작 정책 연구와 입안 과정에는 이들의 목소리가 생략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다.
<뉴스포스트>는 지난 16일 저출생 논의 과정에서 지워지고 있는 대한민국 젊은 여성 청년 11인의 이야기를 서면을 통해 들어봤다. 연령대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 사이로, 6명의 기혼 여성과 5명의 미·비혼 여성으로 구성됐다. 일부는 향후 출산 계획이 있다고 전했다.
출생률 저하, 경제 문제만은 아냐
대한민국 여성 11인에게 우리나라 출생률 저하의 원인을 묻자 경력단절 문제가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은정(30·가명) 씨는 경력단절 여성에 대한 고까운 시선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충청남도 천안시에 거주하는 이민영(31·가명) 씨 역시 "임신 출산 육아를 하면 경력단절이 일어난다"며 "낮은 육아휴직 급여와 회사 복직 가능성 여부를 고려하면 출산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든다"고 말했다.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와 함께 경기 불황도 우리나라 출생률 저하의 원인으로 꼽혔다. 직장인 문지혜(31·가명) 씨는 "여성 경력 단절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치솟는 물가, 내 집마련 어려움"이 출생률 저하의 원인이라며 "제도적으로 보완되고 있다고는 하나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시선과 배려, 이해 등에 대한 기대가 없어 망설여진다"고 털어놨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박은비(27·가명) 씨와 윤서연(33·가명) 씨 역시 경제적 문제를 출생률 저하 원인으로 꼽았다. 특히 윤씨는 "경제 성장률이 낮아서 물가는 치솟고, 임금 동결이 되는 등 경제적인 이유"라고 설명했다. 지난 1월 결혼을 한 장은주(32·가명) 씨도 치솟는 물가를 출생률 저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여성들이 말하는 대한민국 출생률 저하의 주요 원인은 경력단절이나 경기 불황과 같은 경제적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직장인 양소혜(31·가명) 씨는 불안정한 고용문제로 미래 계획을 세우기 어려운 시대 상황과 함께 '성혐오 문제'도 출생률 저하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해외에 거주 중인 조혜경(30·가명) 씨는 한국 사회의 고정된 성 관념을 뼈저리게 느꼈다. 조씨는 "여성으로서 우리나라의 성 관념이 너무 굳어져 있다고 느낀다. 성 관념이 유연하지 못해 태어나면서 성별에 의한 사회적 역할이 주어진다. 자라기도 전에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반발심이 생기는 거 같다"며 "일상 속에서는 성별 임금 격차나 성범죄 문제 등으로 인간으로서 좌절감도 크다"고 말했다.
직장인 오윤아(31·가명) 씨는 여성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출생률 저하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오씨는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엄마의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의 변화가 가장 크다"며 "출산 장려와 관한 각종 제도들이 갖춰졌음에도 여전히 출산율이 높지 않은 것은 돈이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인식변화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 밖에도 직장인 고윤영(31·가명) 씨와 최수진(29·가명) 씨는 시대와 함께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출생률이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고씨는 결혼 후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개인의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문화와 공동체적 의식 완화 등의 가치관 변화가 출생률 저하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꼽았다. 최씨는 "여성들이 아이 같이 만들고 싶은 만큼 가치관이 맞는 남성을 찾는 게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출산, 안 한다 vs 못 한다
출산에 대한 생각은 11명의 여성들 모두 각자 달랐다. 미·비혼 여성들은 문지혜 씨를 제외하고, 기혼 여성은 김은정 씨를 제외하고 모두 출산을 선호하지 않았다. 다만 김씨는 출산 이후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거주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의 출산 여성에 대한 지원 자체는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실제 출산 여성에게 유리하지는 않다"며 "출산 후 삶에서 나 자신은 지워지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한국에서 출산 후 삶을 꿈꿔본 적 없다"고 말했다.
박은비 씨와 윤서연 씨, 고윤영 씨, 장은주 씨, 양소혜 씨는 공통적으로 경력단절 문제 때문에 출산을 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박씨는 자녀 교육비 부담, 장씨와 양씨는 월급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양육비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만 고씨는 "기후 변화와 고령화 사회로 아이가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한 우려와 미안함이 있다"며 환경 문제와 인구 구성 변화도 여성들이 출산을 꺼리는 이유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민영 씨와 조혜경 씨, 오윤아 씨는 출산 후 여성이 겪게 될 신체적·사회적 변화를 우려했다. 이씨는 "출산을 하면 (신체적으로) 몸이 다 상한다. 여성의 몸에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출산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조씨는 "출산으로 여성은 신체적, 사회적으로 잃는 게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오씨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점이 출산을 가장 망설이게 하는 요소다. 출산 전에는 한 집단 또는 조직에 자리 잡고 있던 내가 애를 낳은 후에는 더 이상 'XX팀장', 'XX선생'이 아닌 'XX엄마'가 되는 현실이 너무 슬픈 거 같다. 한 순간에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느낌이 들고, 회의감이 클 거 같아 출산이 두렵다"고 고백했다.
출생률, 반등하기 위해선
본지 인터뷰에 응한 김은정 씨와 조혜경 씨는 출산 희망 및 혼인 여부는 물론 현재 거주하는 국가도 달랐지만, 정부와 여당의 황당한 저출생 정책에 분노하는 마음은 같았다. 김씨는 지난 5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발간한 '재정포럼'에 저출생 정책으로 '여아 조기 입학' 방안을 소개한 사례에 대해 '끔찍한 아이디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조세제정연구원은 "남성의 발달정도가 여성보다 느리다는 점을 고려하면, 학령에 있어 여성들은 1년 조기 입학을 시키는 것도 향후 적령기에 남녀가 서로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김씨는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한 고민도, 출산 당사자들의 생각을 듣고 정책에 반영할 고민도 없는 거 같다"고 지적했다.
조씨는 "정책 대상을 출산 주체인 여성에게 둬야 하는데, 정부나 사회를 위한 도구로 보는 거 같다"며 "특히 최근 여당의 출산 캠페인은 지나치게 모욕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앞서 김용호 국민의힘 서울시의원은 괄약근에 힘을 줘 골반 근육을 강화하는 '케겔 운동'을 '시민건강 출생 장려'라는 취지로 홍보한 바 있지만, 논란이 거세지면서 해당 운동은 잠정 중단됐다.
11명의 여성들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 맞벌이 부부를 위한 돌봄 시스템 확대 ▲ 차등 없는 지원금 정책 ▲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유연 근무제 시행 ▲ 육아휴직 급여 인상 ▲ 남성 육아휴직 필수 보장 및 육아휴직 거부 기업 제재 등 실질적 보장 ▲ 난임치료 및 지원 확대 ▲ 물가안정 ▲ 주거 정책 개선 ▲ 출산 여성 복직 의무화 등을 제안했다.
박은비 씨는 "여성의 경제활동은 증가했으나 실질적으로 기업 문화에서는 여성 근로자의 고용불안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경력단절로 이어진다. 집값 부담을 덜어주기에는 역부족인 정책도 문제"라며 "'나라에 애가 없으니 애를 낳아라'고 하기보다는 애를 낳아서 키울수 있을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출산율도 증가할 것"이라고 전했다.
개별 정책을 넘어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 적극적인 이민 정책 검토 ▲ 아이 양육 환경 조성 ▲ 성폭력 등 여성범죄 근절 ▲ 성차별 철폐 및 성평등 실현 등을 제시했다. 최수진 씨는 "국제결혼 방식의 매매혼은 장려하면서 해외의 정자은행 같은 제도는 논의조차 안 되는 성차별적 정치문화가 문제"라며 "낮은 출생률을 여성에게 책임전가 하는 문화가 당장 사라져야 한다. 대대적인 각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소혜 씨는 "성평등, 여성 범죄에 대한 진지한 해결, 성범죄 양형 높이기 등을 통해 여성들이 이성을 안심하고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결혼과 출산율에도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결혼과 출산은 그간 여성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여성 인권 문제를 이야기하게 된다. 이를 입법, 행정 관계자들이 '남성의 권익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앞으로 더 심각해질 거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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