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우승민 기자)

[뉴스포스트=신현지 기자] 충정로 한 찻집에서 김연대 시인을 만났다. 그의 옷깃에서 알싸한 바람의 냄새가 맡아졌다. 안동의 길안면을 휘감는 바람이었다. 간만에 서울 나들이라는 그의 얼굴이 벌써 까맣게 그을렸다. 봄볕에 푸성귀라도 심다 온 것인지.

처음 김연대 시인을 만난 것은 약 5년 전 쯤. 화백 문학지의 시상식장에서였다. 그때 그는 한국 시문학상 수상자로 부인과 함께였다. 아침 일찍 안동에서 올라왔다는 그는 수줍은 소년처럼 쑥스러운 빛으로 시상식장의 맨 뒷자리였다. 앞자리를 권하는데도 그는 한사코 사양이었다. 그 선한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것인지 5년 만에 보는 그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최근 그가 이상화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이상화시인상을 수상 했다. 수상작은 ‘나귀일기’. 그는 수상소감에서 “상화선생의 시『나의 침실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나에게 투지와 저항정신과 서정을 길러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라고 했다. 이상화 시비가 있는 대구의 달성공원 옆에서 살았던 덕분에 아침저녁 상화 선생의 시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라면서.

이렇듯 상화의 저항정신과 시심을 본받고 싶어 젊은 날 종종 달성공원을 찾았다던 김연대 시인의 문단 등단은 1989년 예술세계를 통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문단의 입문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난 19살에 가출을 했어요. 가출해서 인천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일했는데 너무 외로웠어요. 외로움을 달래려 종종 책을 사 봤는데 그때 조병화 선생의 ’여숙‘이란 시집이 내 맘을 흔들어놨어요. 그 시집을 읽고 또 읽고, 그 시집이 내게 시심을 길러 주었어요. 그리고 또 한 사람, 제 어머니였어요. 전 형제가 4남 1녀인데 제 아래 동생이 사변 중에 세상을 떠났어요. 어머니는 죽은 그 동생을 생각하시면서 시를 읊곤 하셨지요. 어머니의 그런 시적인 감수성이 제 문학에 눈을 뜨게 한 것 같아요.”

 1993년 <꿈의 가출>이 나왔고 이어 1996년 <꿈의 해후>와 2002년 세 번째 시집 <꿈의 회향>이 출간되었다.

“첫 시집의 서문은 조병화 선생님이 써주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조병화 선생님이 무뚝뚝하다고 하는데 제겐 너무 다정한 분이셨어요. 항상 전진하라 말씀하셨고. 그분과 인연은 제가 인천에서 외로움을 달래려 읽었던 그분의 시집 ‘여숙’이란 시집을 읽으면서 시작되었어요. 그러니까  전 그분의 시집으로 시정을 길러나간 거지요.

“세 번의 가출을 했어요. 인천의 미군부대, 공장 노동자, 학원강사, 회사세일즈맨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했어요. 1975년부터 사무기기 가게를 운영하면서 앞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20여 년간을 OA정보통신업계에 몸을 담았어요. 정신없이 일했습니다. 제가 사무기기 부분에서는 시장개척자라고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바쁘게 사는 중에도 그는 불쑥불쑥 이는 허전함을 달랠 길 없어 밤잠을 설치곤 했다. 시심 詩心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배움을 이끌어 줄 선생을 찾아 나설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의 타고난 서정은 특별한 선생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지 모른다. 그는 독학으로 시세계를 탐독했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이때 발표된 작품이 ‘꿈의 회향’ 이다. 그리고 그는 이 시로  아시아 시인·작가 협의회가 수여하는 시 예술상을 받았다.

-꿈의 회향-

무량사 가는 길은 처음 길인데도 

낯설지가 않다

일주문 들어서니 

나무들은 푸르고 철쭉꽃이 붉고나

저와 내가 본래로 둘이 아니기에

이리도 환희심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새소리 바람소리 계곡의 물소리

무정설법 장광설

아, 눈이 시리다

이가 시리다

어금니에 물리는 짙푸른 저 하늘 

 

그는 자신의 맑은 시심은 1994년 80세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제 어머니는 영혼이 맑고 심령이 깨끗하시고 다정다감하셨어요. 그런데 평소 몸이 약해서 자주 앓아 누우셨지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많이 해야 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영향을 받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한학자이셨던 할아버님으로부터 한시를 배워 읊으셨고, 시조를 100수 이상 외우시고 감수성도 풍부하셨어요. 

그런 때문인지 어머니는 글을 쓰시곤 하셨는데 제가 어머니의 친필 가사를 정리해서 유고집을 펴냈어요. 어머니의 필체는 내방가사도 아니고, 현대문도 아닌 특이한 문체예요. 비록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신문도 읽으시며 현대소설도 읽으셨기 때문이지요. 제 친구들이 제 어머니의 글을 제 시와 비교하면서 제 시는 시도 아니다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가난으로 고향을 떠났던 그가 43년의 오랜 타향살이를 마치고 다시 고향을 찾은 건 2003년, 그는 숙원이었던 고향 마을의 길산초등학교 대곡분교를 매입해 점심문학관을 개관했다. 이곳에 부모님의 유품도 전시해 두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산소가 마주보이는 마당 한 곳에 석탑을 세워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면서 시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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