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환 시인 (사진=신현지 기자)

[뉴스포스트=신현지 기자] 목포는 바다의 도시, 항구의 도시로 유명하다. 그리고 예로부터 문인·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노래로 대변한 이난영을 시작으로 극대 극을 최초로 한국에 도입한 김우진, 한국 최초의 여류 장편 소설가 박화성, 연극연출가이며 희곡작가인 차범석, 평론 문학의 독보적인 문학평론가 김현, 가수 남진, 남도창의 오정해, 바둑계의 조훈현 등등.

그리고 또 한 사람 명기환 시인이 있다. 특히 그는 유별난 바다 사랑 시인으로 목포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는 진정한 목포의 인물이다. 목포에 나서 목포에서 뼈가 굵은 그는 우리나라 섬을 거의 다 들러봤을 정도로 바다와 섬에 빠져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미당 서정주 선생이 그에게‘섬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뉴스포스트>가 명기환 시인을 처음 본 것은 지난 5월 중순, 문인들의 문학교류장인 광시문학축제에서였다.

첫눈에 그는 걸걸한 바다사나이 같은 인상이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굵직굵직한 선, 그리고 목청 크게 웃는 모습은 파도를 벗 삼아 대양을 누비는 사나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서정성이 짙은 바다시를 쓰는 시인이라니.

더구나 그가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불후의 명곡이 된 ‘목포의 눈물’의 뒤를 이어 ‘목포의 사랑’을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는 인물이라니. 명 시인의 ‘목포의 사랑’과 함께 잠시 그와 시간을 같이 하기로 했다.

 

-목포의 사랑-

유달산 기슭에 노을은 지고

삼학도 파도소리에 그리움이 흐르면

가슴에 맺은 언약 사랑으로 부르리

나의 고향 목포의 사랑

 

사랑의 언덕 갓바위에 오르면

동백꽃 피어나듯 그리움이 붉게 물들고

목포를 사랑했던 그 땀흘린 흔적

그 흔적이 노래가 되네

사랑의 노래를 사랑으로 부르리라

목포의 사랑을

 

노적봉 우뚝 솟은 유달산에서

세월의 한숨소리는 소리 없이 흐르고

영산강 갈매기도 사랑노래 부른다.

나의 고향 목포의 사랑을

 

사랑의 언덕 갓바위에 오르면

동백꽃 피어나듯 그리움이 붉게 물들고

목포를 사랑했던 그 땀 흘린 흔적

그 흔적이 노래가 되네

사랑의 노래를 사랑으로 부르리라

목포의 사랑을

명기환 시인(사진=신현지 기자)

그러니까 명 시인의 ‘목포의 사랑’은 이난영의 애수 어린 노랫말과는 달리 꿈과 낭만으로 생활의 활력을 주는 노랫말이 특징이었다.

물론 이것은 명 시인의 깊은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명 시인은 자신이 창작한 ‘목포의 사랑’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동안 우리 목포 사람들은 술이라도 한잔 마시는 날이면 전라도의 애국가처럼 ‘목포의 눈물’을 목 터지게 부르며 맺혔던 한을 풀어내곤 했다. 그만큼 이난영 씨의 ‘목포의 눈물’은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 또 나라 잃은 애환, 더욱이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목포의 통한이 서린 가사와 곡조였다.

솔직히 목포의 설움은 일제 강점기에 그치지 않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목포는 호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간직한 통한의 역사였던 건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로 남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이제는 과거의 아픈 역사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주는 그런 도시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사람의 가슴에 따스함과 풍요로움을 주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런 고민 끝에 내가 자란 목포에 노랫말로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목포의 사랑’이다. 이 노랫말처럼 이제는 아픔과 서러운 과거를 잊고 사랑과 희망으로 목포를 가꾸어 나가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한의 도시, 예술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도시. 그래서 목포인은 모두가 시인이요 화가이며 노래꾼이라고 말하는 명 시인은 지금도 ‘목포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 밤낮이 없다. 지난 5월 12일 성옥미술관에서 펼쳐진 운남 오송희 화백의 「섬, 사랑과 일출」전에는 그가 직접 ‘목포의 사랑’을 불러 많은 이들의 열창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목포시민의 준비된 성숙함을 보여줄 때라며 목포 시민의 기대와 찬사는 물론 희망찬 새 목포 알리기에 지역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있다.

이렇게 희망과 활력의 도시로 목포를 꿈꾸는 명기환 시인. 그의 문학의 계기는 1963년 동국대 국문학과 3학년 목포에서 열린 시화전이었다. 이 시화전에서 선보인 ‘출항’을 계기로 그는 섬과 바다에 관해 수많은 시를 써 왔다.

왜 하필 섬과 바다였냐는 물음에 그는 “나의 시심의 원천은 바다다. 바다에서 태어났고 바다에서 자랐고 바다에 빚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니 목포의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되면서부터 목포를 ‘시의 도시’로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던 것이고.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 목포 시민은 모두 시인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그의 남다른 목포 사랑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해남, 완도, 진도, 목포를 오가는 큰 배를 7척이나 갖고 있었던 선주였단다. 그런데 1963년 1월 8일. 해난사고로 아버지의 배인 ‘연호’는 156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바다 깊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그러니 그가 목포에서“첫 시화전을 연 것은 진혼가 대신이었다.

이처럼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그의 목포사랑은 목포를 넘어 2002년에는 망망대해로 향했다. 그가 민간인 최초로 광개토대왕함에 승선해 9개국 13개 항을 항해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해군에서 출장비까지 받고 떠난 항해였던 만큼 또 즉석에서 시를 토해내는 시인으로 알려진 만큼 그는 바다에 관한 시를 매일 한 편씩 쏟아냈다.

섬과 바다를 누비며 떠오르는 시상을 그때그때 포착해 아름다운 시로 풀어내는 것에 탁월한 그는 창작의 기쁨을 주는 바다와 섬을 이렇게 표현했다. “섬은 신비로운 어머니 같은 존재다. 섬에 첫발을 들여놓는 기분은 첫사랑 여인의 첫 단추를 여는 기분이다.”라고.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소개해달라는 말에 명 시인은 ‘목포에 오면’을 가장 아낀다며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기운차게 읊었다.

-목포에 오면-

목포에 오면 휘파람이라도 불자

호남선 종착역 표지판 앞에서

눈물

목포의 눈물을 사랑으로

휘파람이라도 불자

망울진 꽃들이

울음 삼키다

토해 낸 핏빛 멍

바다는

꽃이파리로 부끄러움을 가리고

꼭 와야할 사람을 위해

신문을 편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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