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중앙아시아인 정착 요람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 탐방기
전체 주민 67% 외국인…중앙아시아 식당·할랄 식품점 포진
공동육아터, 다가치배움터, 러시아어권지원센터 등 운영
러시아어 익숙하고 공동체 부재…주민센터, 행정 서비스 전무
교육·의료·거주 복지 사각지대…"내국인과 분리된 하나의 계급"
"구조적 불평등 해결해야…지자체에서 정책 벤치마킹 필요"
우리나라도 이주노동자 150만명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환경과 삶은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참혹합니다. 회사 사용자인 사업주가 때리고 폭언해도 피해의 당사자인 이주노동자들은 현재 고용허가제의 악습으로 인해 사업장 변경 자체가 안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본지 뉴스포스트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겪고 있는 업종별 차별 실태와 사회 곳곳에 뿌리 깊이 만연한 고용허가제의 문제점과 어떤 불법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지 짚어보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제시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최종원 기자] 23일 오후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에 위치한 함박마을을 방문했다. 함박마을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들과 중앙아시아 출신 외국인들이 2017년부터 집단 거주하면서 형성된 러시아권 마을이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 사는 한국계 동포를 뜻한다. 1863년 연해주(현 블라디보스토크)에 13가구 정착을 시작으로 1904년 한인촌 32개가 형성됐고,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본거지로도 활용됐다.
하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서기장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다. 이주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수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인들은 이후 특유의 근면성으로 전문 직종에 종사할 수 있었지만, 1991년 소련 붕괴로 경제 기반이 무너져 러시아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2004년엔 재외동포법 개정으로 동포로 인정받으면서 상당수가 모국인 한국으로 귀환했다.
2018년엔 대한고려인협회가 발족해 이곳 함박마을에 들어섰고, 2023년엔 고려인 문화주권 선포식을 가지며 인천이 고려인 정착의 중심지임을 공식화했다. 현재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3000여명으로 전해진다.
한국어보다 러시아어 익숙…화덕빵·할랄푸드 인기
"다브로 바쫠라바찌(어서오세요)" "스파시바(감사합니다)"
함박마을은 어딜 가도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더 많이 들리는 곳이다. 플로브(기름밥)를 먹기 위해 한 식당에 들어가니 종업원이 러시아어로 말을 걸었다. 고려인은 한국인과 외모가 유사해 구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종업원은 한국어로 응대했다.
식사를 마친 이후 베이커리와 식료품점을 방문했다. 베이커리에선 주로 탄드르(흙으로 만든 가마처럼 생긴 화덕)에서 구운 화덕빵과 호밀빵을 판매했다. 빵에 양고기를 듬뿍 넣어 탄드르에서 구운 우즈베키스탄식 만두 '삼사'와 러시아의 국민 컵라면 '돠시락(Доширак)'도 진열해 눈길을 끌었다.
중앙아시아인 대부분이 무슬림이라 식료품점에선 할랄 푸드를 주로 판매했다. 안남미라고 불리는 장립종 쌀과 각종 향신료, 밀가루, 쇠고기와 닭고기로 만든 소시지, 말발굽 모양의 킬바사(колбаса) 등이 있었다. 식당이나 식료품점이나 공통적으로 술을 판매하지 않았다.
주민 67% 외국인…정착 위해 남동공단 등에서 노동
연수구청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함박마을 인구는 총 1만2767명이다. 이중 고려인과 러시아·우즈베키스탄 등 10개 국가의 외국인이 67%(8560명)를 차지한다. 주민 3명 중 2명이 외국인인 것이다. 이때문에 플로브와 삼사(고기빵), 보르쉬(수프), 케밥 등 이국적인 식당과 할랄 식료품점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은 주로 남동국가산업단지(남동공단)에서 일한다. 함박마을 내 출입국 관리·행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박성래 공인행정사는 "외국인들은 1년에 한번씩 비자 연장을 해야해서 사무소를 찾는 경우가 많고, 돈 벌려고 와서 다들 바쁘다"며 "새벽에 나가서 저녁까지 힘들게 일하는 건 한국 사람들과 똑같다"고 말했다.
상당수는 정착을 위해 가족과 함께 거주한다. 학교 앞에선 차도르를 쓴 여성이 아이와 함께 귀가하고 있었고, 식당에선 금발의 키큰 러시아인 아내와 고려인 남편이 밥을 먹고 있었다. 부동산에는 집을 보기 위해 찾아온 우즈베키스탄인 가족이 있었다.
조은부동산 관계자는 "임대차계약서는 외국인도 다 똑같이 써야 해서 우리가 직접 설명하고 각자 서명한다"며 "번역 어플이 잘 돼 있어서 소통의 어려움은 크지 않고, 각자 경제력에 맞게 주택을 임대하는 편"이라고 밝혔다.
이주노동자·이주배경청소년 위한 각종 교육 진행
이주노동자들은 바쁘게 일하는 특성상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연수구가족센터 산하 함박공동육아나눔터에선 신청을 받아 아이를 함께 돌봄으로써 육아 부담을 덜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눔터 관계자는 "하루에 많게는 50명 정도를 케어하고, 이주노동자 자녀 외에도 다양한 아이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녀가 초등학생일 경우 근처 함박초등학교나 문남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다가치배움터'에선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아이들을 위해 방과후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배움터 측은 다문화 가정과 한국인을 연결하는 문화 교류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움터 2층으로 올라가니 초등생 대상의 한국어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 한국어 작문을 하고 있었고, 고려인 한국어 선생님은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학생 한명을 일일이 보살폈다. 방과후 선생님은 학생에게 지금 들어온 사람이 '기자'라며 '기자' '신문'의 뜻도 설명해줬다.
배움터 관계자는 "한국어 교육은 초등, 중등 청소년 반으로 운영되고 퇴근 이후 성인(학부모) 반도 운영되고 있다"며 "주로 고려인과 중앙아시아·러시아·아랍인들도 참여하고 있다. 전날에는 KT 직원들이 와서 같이 케이크를 만들면서, 학생들이 1개씩 가져가고 나머지는 사할린 동포복지관에 기부했다"고 전했다.
러시아어권 아이들을 위한 비영리 민간 지원센터도 운영 중이다. 스바보다 러시아어권지원센터는 국비 지원 없이 후원으로만 운영되는 비영리 민간단체다. 이주배경청소년들을 위해 학원비를 받지 않고 한글학교와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센터는 마치 가정집 같았는데 실제로 센터장과 아내 분이 거주한다. 임홍순 스바보다러시아어권지원센터장은 "한국어 수업은 저와 아내가 도맡고 있는데 힘들 때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도와주신다"며 "이주배경청소년들이 언제든 와서 배우고 쉬고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한국어 습득 어렵고, 커뮤니티 시설·행정 지원 '전무'
함박마을의 이주노동자 정착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부 소상공인들은 "외국인들이 범죄를 많이 일으킨다"고 지자체에 항의하며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날 만난 한식당 운영 소상공인도 "담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무면허 운전이나 미등록 차량 운전 등 크고 작은 범죄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연수구청 관계자는 "지난해 5월 지자체 최초로 내외국인 간 상생을 위한 사회통합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다"며 "사회통합 정책 실행을 통해 내외국인 주민 간 상생을 도모하는 조례를 만든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러시아권 화자 입장에서 한국어는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에 속하고, 러시아어만 사용해도 생활에 문제가 없다 보니 소통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다. 임 센터장은 "한국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데 장소가 마땅치 않고 단체 입장에선 특별한 수입이 없다 보니 교육 자원봉사나 후원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근처에 위치한 연수1동행정복지센터에는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이 한 명도 없다. 외국인이 주민의 67%를 차지함에도 정착 지원 프로그램도 따로 갖춰지지 않았다.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는 "난민 분들은 민생쿠폰이나 푸드뱅크를 신청하는 경우도 있지만, 외국인만 따로 지원하는 경우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교류하는 커뮤니티도 전무한 실정이다. 스바보다지원센터와 한국고려인협회, 너머 인천고려인문화원 등이 있긴 하지만 지원 주체가 상이한 데다 각자 생계가 우선이다 보니 모이기 쉽지 않다는 후문이다. 다가치배움터 관계자는 "공동체 시설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다같이 모일 수 있는 곳은 따로 없다"고 전했다.
교육·의료·주거 등 불평등 고착화…"정책 다양하게 보고 배워야"
정착을 추진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언어, 음식, 교육, 의료, 주거 등 사회 전반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우현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 사업팀장은 "이주노동자 자녀들은 한국어가 안되서 수업을 따라가기 쉽지 않고, 소통도 잘 안되다보니 진도가 늦어져 한국 학부모들의 기피 지역이 된다"며 "이주청소년 스스로 적응해야 하는데 30~40% 정도만 한국어를 제대로 습득하고 나머지는 잘 못 배우고 그냥 살아간다"고 밝혔다.
김 팀장은 이어 "지자체나 민간에서 한국어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결국 학교 시스템이 중요한데 잘 갖춰져 있지 않다"며 "의료는 그나마 인천이 적십자병원도 있고 환경이 괜찮지만 여전히 경제적 부담이 큰 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정착 지원 정책의 한계도 지적했다. 김 팀장은 "동포들은 국적이나 정착 지원금을 주는지 궁금해하는데 정부에선 E-9이나 H-2 같은 체류 비자를 줄 뿐, 교육이나 복지 정책을 펼치지는 않는다"며 "함박마을은 특히 가족들과 사는 경우가 많은데 노년의 부모님을 부양하거나 아이의 교육, 돌봄 문제에서 복지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이 내국인과 분리된 공간에서 사는 것이 하나의 계급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이어갔다. 김 팀장은 "이주노동자든 동포든 주무 부서가 없고 정치인 입장에선 유권자도 아니니 중앙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렵다"며 "법무부에선 이들을 관리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여성가족부 정책에도 다문화가족은 포함이 잘안되서 대다수가 사각지대에 있는 게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어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가도 불평등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김 팀장은 "명문대를 졸업해도 외국인은 대기업 취업이나 주재원이 되기 더욱 어렵고, 결국 다문화센터 관리 일이나 상담원 같은 계약직에 몰리게 된다"며 "단순히 한국어 공부를 하라는 게 어떻게 보면 기만적인 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좋은 정책들을 벤치마킹해 불평등 구조를 완화해달라고 강조했다. 김 팀장은 "이주노동자나 외국인에 대한 인식이 잘 형성돼 있지 않고, 정책 당국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보고 배울 수 있는 정책들이 많이 있으니 빠르게 정책을 펼쳐나가면 좋을 것 같다"고 당부했다.
연수구청 관계자는 "내외국인 주민 간 사회통합을 위한 조례와 다가치배움터 운영 등을 토대로 모든 연수구민이 함께 상생하며 웃을 수 있는 연수구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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