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보와 차도 구분 없는 공유도로의 역설
- 아스팔트에 ‘블록’ 무늬 그리자 넓어진 보행권
- 보행자 우선도로, 법적 우선권은 아직

[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한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고 해보자. 운전자는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보통은 갑자기 도로로 튀어나온 보행자에게 “왜 도로로 뛰어들어서 멀쩡한 운전자 인생을 망치느냐”고 힐난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이 보도블록이었다면, 운전자는 단숨에 ‘보행자 도로에서 운전해 사람을 해쳤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도로가 ‘누구의 공간’으로 정의되느냐에 따라 책임의 소재가 달라지는 것이다.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 포장된 도로. 기존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곳은 보행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사진=김혜선 기자)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 포장된 도로. 기존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곳은 보행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사진=김혜선 기자)

만약 도로가 차도도 인도도 아니라면 어떨까? 도로가 분리되지 않으면, 운전자는 속도를 줄이고 더욱 조심성 있게 운전을 하게 된다. 보행자는 보도블록이 도로 전체로 확대된 것처럼 길을 누빌 수 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을 없앤 ‘무정부 상태’의 도로가 오히려 보행자의 안전을 향상시킨다는 역설을 불러오게 된다.

이처럼 하나의 도로를 보행자와 운전자 구분 없이 사용하는 개념은 ‘공유도로(Shared Space)’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유도로에 ‘보행자 우선권’을 더한 보행자 우선도로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도시·군계획시설의 결정·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에는 폭 10m 미만의 골목길을 보행자 우선도로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스팔트 걷어내니 보행자가 보였다

공유도로(보행자 우선도로)의 핵심은 자동차 전용구역에 깔린 아스팔트 대신 블록을 포장하거나, 아스팔트가 블록처럼 보이도록 무늬를 찍어 운전자로 하여금 ‘왠지 보도블록처럼 보이게’하는데 있다.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지만, 공간 자체가 보행자의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도로의 분위기를 단순히 ‘보행자 위주’로 바꾼 것만으로도 보행권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건축도시공간연구소가 지난 2019년 발표한 ‘보행자우선도로 시범사업 성과분석 및 활성화 연구’에 따르면, 도로 포장을 바꾼 대상지들은 대체로 차량의 이동 속도가 감소하고 보행자들이 도로를 임의 횡단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영등포구 영중로4길의 경우, 전체 차량 통과 속도가 환경을 바꾸기 이전보다 1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차량 속도가 감소하니 보행자의 임의횡단 수는 94회에서 232회로 증가하는 등 보다 자유롭게 도로를 누볐다. 사업 만족도 평가도 안전성, 편리성, 쾌적성 등 전반에서 50%가 증가했다.

도로를 아스팔트 대신 블록으로 포장한 영중로 4길의 변화. (사진=네이버 지도)
도로를 아스팔트 대신 블록으로 포장한 영중로 4길의 변화. (사진=네이버 지도)

마포구 월드컵북로48길도 아스팔트 도로를 블록처럼 포장하자 임의횡단 수가 72회에서 136회로 크게 늘었다. 보행자가 도로의 중앙을 이용하는 비율은 기존 23.7%에서 34.4%로 증가했다. 연구진은 “보행자에 ‘도로 전체를 이용할 수 있다’는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차량속도는 평균 13.46%로 감소했다. 차량의 양보 행태도 사업 이전에는 68회였지만 89회로 증가했다. 차량 교통량은 기존 74대에서 105대로 늘어났는데,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지 않으면서 운전자가 자연스럽게 보행자를 의식하고 양보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온 셈이다.

아직은 무늬만 ‘보행자 위주’…법적 보호 필요

다만 우리나라의 보행자 우선도로는 법적으로 보행자에게 ‘통행 우선권’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다. 보행자 우선도로는 현행 도로교통법에서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아니한 도로’로 구분되는데, 보행자는 차와 마주보는 방향의 길 가장자리 또는 길 가장자리구역으로 통행해야 한다고 정해두고 있다. 도로의 사용권을 사실상 운전자에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보행자 우선도로에 ‘보행자 우선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법안은 지난 20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기한 만료 폐기됐다. 당시 주승용 의원은 보행자 우선도로에 차량 속도를 30km이하로 제한하고, 보행자에 도로 전체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1대 국회에서도 지난해 12월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다. 한병도 의원이 발의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차량 속도를 20km이하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보행자가 보행자 우선도로를 전부 이용해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운전자에게도 서행 또는 일시정지 등 보행자를 보호할 의무를 부여했다.

전문가들은 보행자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보도·차도가 혼재된 도로에 보행자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의 ‘보차혼용도로 보행자 사고 위험성과 예방대책’ 연구에 따르면, 보행자 사망사고의 74.9%는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 발생했다.

한병도 의원은 “우리나라는 주택가 및 상업지역 주변에 보행자 통행이 많고 도로 폭이 좁은 이면도로에서 보행자 사망사고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집, 상가 주변 같은 우리 동네 도로에서 보행자들이 안심하고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운전자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교통체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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