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16개월밖에 되지 않은 여아 정인이가 양부모의 끔찍한 학대 끝에 사망했다. 신고 의무자들이 지속적인 신고를 했음에도 정인이는 국가 기관의 방치 속에 고통스럽게 숨을 거뒀다. 아동학대 방지법은 진화했다지만, 끝내 아이의 생명을 지킬 수 없었다. <뉴스포스트>는 제2, 제3의 정인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아동학대 범죄의 근절과 예방법을 고민해보았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정인이를 살릴 기회는 최소한 세 차례가 있었다. 올해 3월 시행 예정이던 이른바 ‘즉각 분리 제도’가 있었다면, 정인이는 두 번째 신고에서 끔찍한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해 말 아동복지법 개정으로 1년에 2회 이상 신고가 접수된 아동들은 부모로부터 분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서울 양천구에서 발생한 아동학대 사망사고인 이른바 ‘정인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들끓고 있다. 16개월 여아인 정인이는 지난해 1월 양부모에게 입양된 이후 지속적인 학대에 시달렸고, 입양 270여 일 만에 사망했다. 어린이집 교사부터 소아과 전문의까지 총 3차례나 아동학대 의심 신고가 접수됐지만, 경찰은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며 양부모에게 무혐의 조치를 내렸다.
학대 신고 직후 정인이가 양부모로부터 분리됐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실제로 같은 해 경남 창녕에서 친모와 계부의 학대를 받다가 탈출한 9세 여아는 다행히 가해자와 분리돼 위탁 가정의 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정인이는 수시 기관의 안일한 대처로 다시 가해자의 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학대 피해 아동 84%는 가정으로 돌아가
불행하게도 정인이와 같이 아동학대 피해자가 다시 학대가 이뤄지는 공간으로 돌아간 사례는 가해자로부터 안전하게 분리된 사례보다 많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가정 내에서 발생한 아동학대는 2만 3,883건이다. 이들 중 학대 아동이 가정에서 분리된 사례는 12.2%에 불과하다. 83.9%는 원래 가정에서 계속 생활했고, 나머지 3.3%는 임시 분리 조치됐다가 가정에 복귀했다.
아동학대 피해자가 가해자와 분리되지 않을 시 다시 학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은 통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학대 피해 아동이 다시 학대를 받은 재학대 사례는 3,431건이다. 비율로 살펴보면 11.4%에 이른다. 재학대 가해자 94.5%는 부모다. 여기서 부모는 친부모와 양부모, 계부모를 모두 포함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제2, 제3의 정인이가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다.
아동학대의 잔혹성과 심각성은 기타 중범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피해자 보호의 기본 원칙이 유독 아동학대 범죄에서 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원가정 보호원칙’이 작용했다는 지적이 있다. 현행 아동복지법은 ‘아동을 가정에서 분리해 보호할 경우 신속히 가정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며 원가정 보호원칙을 규정했다.
아동학대를 범죄가 아닌 ‘가정사’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원가정 보호원칙과 맞물려서 학대 피해 당사자를 분리시키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는 <뉴스포스트>와의 통화에서 “경찰에 아동학대 신고를 했는데 ‘애 키우다 보면 그럴 수 있다’ 이런 반응을 듣고, 허탈해하는 분들이 많다”며 “(수사 기관에서) 대충대충 좋게좋게 넘어가려는 사례가 많다”고 전한 바 있다. 정인이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게 공 대표의 설명이다.
아동학대 분리 대처, 해외는?
한국보다 아동 인권 의식이 높은 선진국들은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적극적으로 분리한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8월 발간한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친권 제재 관련 규정의 한계와 개선과제’에 따르면 미국의 모든 주는 자녀의 최상 이익을 위해서라면 부모의 권리가 종결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심각한 아동학대가 발생할 시 자녀의 친권 문제까지도 국가가 나선다.
▲ 부모의 상해 위험으로 아동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을 때 ▲ 아동의 기본적 필요를 부모가 충족시킬 수 없을 때가 해당한다. 정인이의 사례처럼 부모의 만성적인 학대뿐만 아니라 방임까지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텍사스에서는 아이의 후견인이나 위탁부모, 양부모, 친족, 6개월 이상 아동을 돌보는 자, 정부 기관, 가정보호국, 아동복지기관까지 나서서 친권 박탈 자격을 법원에 청구함으로써 아동을 가해자와 분리할 수 있다.
박언하 대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2018년 발표한 ‘한국의 아동학대예방 정책의 개선방안: 외국의 아동학대예방 정책 분석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1970년대에 이미 아동 체벌을 법적으로 금지한 대표적인 아동 인권 선진국 스웨덴 역시 원가족 보호를 원칙으로 아동학대 방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아동학대나 방임 수준이 심각해 가족 내에서 보호받지 못할 것으로 판단될 경우 아동을 가정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아동학대 신고 건 중 아동의 위험 수준이 높다고 판단되는 경우 경찰과 지방정부의 사회서비스국은 물론 민간 기관 NSPCC(Nation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Children)에게 부모로부터 아동을 격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지방정부와 NSPCC는 가정재판소 판사에게 아동사정 명령, 긴급보호 명령, 보호 명령, 감독 명령을 요청할 수 있다고 논문은 설명했다.
분리 조치와 함께 인프라 확충도 必
아동학대 피해 당사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분리 조치만큼 관련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 전문가들은 아동학대 방지 인프라가 부족한 대한민국에서 기계적인 분리는 또 다른 피해를 키울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즉시 분리해서 도저히 시설이 안 나오면, 정작 진짜 분리해야 하는 아동이 분리되지 않아서 또 사망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인력난도 심각하다. 자신을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이라고 밝힌 누리꾼은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현재 대부분 지역의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은 5인 이하고, 1명이 배치된 곳도 많다. 업무를 익힐 틈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된다”며 “맡길 쉼터가 없어 전국 쉼터에 구걸하듯 전화해 아동을 맡기고 온다. 야간 출장비도 없고, 학대 아동 치료 의료비도 편성해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해당 청원은 5천여 명의 동의만 얻고 마감됐지만, 정인이 사건 이후 재조명됐다.
한편 지난해 기준 피해 아동들이 생활하는 학대 피해 아동 쉼터는 전국적으로 72곳에 불과하다. 국내 아동보호전문기관은 68개소로 전국 226개 시·군·구의 30%에 불과한 수준이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말 발표한 올해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아동호보전문기관을 81개소로, 학대피해아동 쉼터도 91개소로 증설한다고 밝혔다. 또한 올해 안에 전국 모든 시·군·구에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을 총 664명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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