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신호 횡단보도서 일시정지 차, 고작 11.3%
-1시간 동안 정지선 앞 멈춘 차량은 단 두대

보행권은 시민들의 안전한 삶을 가늠할  바로미터다. 1997년 서울시는 인구 천만 이상의 대도시 중 최초로 보행권 조례를 제정했지만 과연 우리는 걷기 좋은 도시에 살고 있을까? 자동차 3천만 시대를 앞둔 2021년, 도심은 오히려 차량에 압도당해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이다. 보행자가 다녀야 할 인도를 각종 시설물과 개인형 이동장치가 점령했으며, 특히 어린이·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이동권은 목숨을 담보로 한다. <뉴스포스트>는 보행권 관련 다섯 차례의 기획 시리즈를 통해 도심지 보행 현장과 보행친화거리를 살펴보고 보행권 개선의 길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홍여정 기자] 1990년대 후반, 도로 위 양심운전자를 찾아다니던 MBC 예능 프로그램 ‘이경규가 간다’가 방영된 적이 있다. 늦은 밤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에게 ‘양심 냉장고’를 선물하는 내용이다. 정지선 지키기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던 시절, 당시 방송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새벽까지 잠복했지만 신호를 지키며 정지선을 준수하는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 한 장애인 부부가 탄 경차가 정지선 앞에 차를 멈췄고, 해당 사연은 전국민적으로 ‘정지선 지키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정지선 지키기’ 인식은 나아졌을까? 

서울 송파구 소재 한 초등학교 앞. 무신호 횡단도보가 설치되어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서울 송파구 소재 한 초등학교 앞. 무신호 횡단도보가 설치되어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도로교통법 제27조(보행자의 보호) 제1항에 따르면 ‘운전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에는 보행자의 횡단을 방해하거나 위험을 주지 아니하도록 그 횡단보도 앞(정지선이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 정지선을 말한다)에서 일시정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특히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운전자의 일시정지 준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2019년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실시한 ‘보행자 횡단 안전도 조사’에서 무신호 횡단보도 80회 횡단 시도 가운데, 보행자의 횡단을 위해 운전자가 정차한 경우는 9번(11.3%)에 불과했다. 뉴스포스트는 무신호 횡단보도를 찾아 보행자를 보고 멈추는 차량이 있는지, 이밖에 보행환경의 위험요소 등을 확인해봤다. 

스쿨존 횡단보도 앞…멈추지 않는 차들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소재 한 초등학교 앞. 이곳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2군데 있다. 어린이보호구역이기 때문에 차량 속도는 30km로 제한된다.

우선 기자가 횡단보도를 직접 건너가 봤다. 총 10번의 시도를 했지만 횡단보도 앞 정지선에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는 차량도 없었다. 건너가기 위해 다가오는 차량을 주시하며 손으로 막아도 차들은 기자 앞을 그냥 지나쳐갔다. 스쿨존 조차 보행자보다 차가 우선인, 어색할 것 없는 당연한 도시의 관행이었다.

이후 지나가는 보행자와 운전자를 관찰했다. 과속장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한 속도 30km이상 빠르게 달리는 차량도 다수 있었다. 보행자들은 횡단보도 앞에서 양쪽을 살피고 뛰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스쿨존 내에서 주정차가 불법인데도 차에서 내려 커피를 구매하는 운전자도 볼 수 있었다.

횡단도보도 다가오는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사람들 앞을 지나쳐갔다.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횡단도보도 다가오는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사람들 앞을 지나쳐갔다.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횡단보도에 한 어린이가 길을 건너기 위해 서있었지만 차량은 멈추지 않았다.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횡단보도에 한 어린이가 길을 건너기 위해 서있었지만 차량은 멈추지 않았다.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횡단보도 앞 어린이를 보고 정지하는 차량도 없었다. 스쿨존이니 어린이 보행자라도 우선할 것이라는 기대는 강추위와 함께 얼어붙었다. 아이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다가오는 차량을 확인하고 있어도 운전자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심지어 한 승합차 운전자는 유턴을 하며 횡단보도를 침범해 건너가려는 아이의 길을 막기도 했다. 

스쿨존에서 아동 교통사고가 날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이른바 ‘민식이법’ 시행 후 제한 속도 준수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또 다른 사고의 원인인 횡단보도 주정차 문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스쿨존에서조차 자동차는 어린이 보행자의 우위에 있었고, 아이들은 차량을 피해 쫓기듯 횡단보도를 건넜다.

약 1시간의 취재 동안 이날 정지선에 멈췄던 차는 총 두 대. 이들 차량은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없음에도 확실히 멈춘 뒤, 안전함을 살피고 출발했다.

차도로 걸어다니는 시민들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차도로 걸어다니는 시민들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안전한 보행습관도 동반돼야

또 다른 문제는 보행자의 안전습관이 미흡했던 점이다. 운전자의 보행자 보호 의무와 함께, 보행자의 안전한 보행습관이 동반돼야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있다. 이날 보행자들은 학교 앞 2차선 좁은 도로를 수시로 무단횡단했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도로를 건너는 학부모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눈 쌓인 인도를 걷기 싫어서인지 차도로 걸어 다니는 시민들도 유독 많았다.

주차장이 아닌 인도에 정차된 차량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주차장이 아닌 인도에 정차된 차량  (사진=뉴스포스트 홍여정 기자)

인도 곳곳에는 보행자 통행을 방해하는 요소들도 발견됐다. 인도 반 이상을 차지하며 세워져 있던 자전거, 가게 앞 정차된 차량들, 버스정류장에 놓인 전동킥보드 등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이는 보행자의 보행권을 고려하지 않은 흔적들이다. 자신과 내 가족의 안전한 보행권을 위해 모두의 인식 개선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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