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충남문학관 관장 / 작가

[뉴스포스트 전문가칼럼=이재인] 대체로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는다. 가정과 학교는 물론 사회교육 기관에서 수고로운 봉사까지도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한 가정에 자녀가 귀하고 그래서 어려운 훈련은 애초부터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이다. 시대가 흘렀어도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숭상하고 그 진리를 향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흠모한다.

필자가 대학의 학생처장을 맡아서 첫 신입생 환영회를 ‘음성 꽃동네’로 가도록 총장께 허락을 득했다. 신입생 4백여 명, 거기에다 재학생 대표·교직원까지 참여하여 불우한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청소, 환자 목욕시키기, 주변 환경 개선을 위해 삽자루를 들고 나섰다.
지금 같으면 학부형들이 난리를 쳤을 테지만 당시에는 박수를 받고 1박2일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귀교했다. 귀한 자녀일수록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분연히 일어 설 수가 있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릿지 대학의 귀족 자녀들이 전쟁 시에 솔선수범으로 전장으로 뛰어나갔다. 그것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쥬이다. 참고 이겨내는 슬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한나라 충신으로 일컬어지는 소무는 무제 때인 BC 100년에 중랑장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19년이란 세월을 갇혀 있었는데도 의연히 버텼다. 당시 그는 항복을 강요받았지만 절의를 굽히지 않고 이를 거부, 바이칼 호 주변의 황야로 보내져 억류생활을 했다.

소무는 사신의 깃발을 뜯어 먹고 염소의 젖을 짜먹으면서 거친 벌판에서 살아남았다. 끝내 소무는 갖은 회유를 이겨냈고 소제가 즉위한 후 흉노와의 화해가 성립되어 BC 81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19년 만에 영웅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소제는 충절을 높이 사 전속국에 봉했고, 소제의 뒤를 이은 선제도 그의 노고를 치하하여 관내후에 봉했다.

이 얼마나 인격적인 체취인가?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무에게는 젊은 시절 참고 견디는 훈련과 교육이 그를 살린 셈이다. 교육은 개인을 위한 일일뿐 아니라 그 사회 전체를 살리는 일이다.


이재인
소설가

전 경기대교수
충남문학관 관장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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