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충남문학관 관장 / 작가

[뉴스포스트 전문가칼럼=이재인] 어린 시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인식할 때 필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성한 인간에게 왜 하필 동물이라 명명했는가? 그 해답은 차츰 나이가 들면서 인간도 동물은 동물이되, <신성한 동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신성하다고 할 때에는 인간답게 처신하고 인간답게 생활을 해야만 그렇다. 규범과 사회적 질서에 따라야 하고 양심과 더불어 서로가 존중될 때 인간답고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꽤 오래 전부터 저자와 출판사의 신뢰의 표현이랄까? 약속의 징표로 사용했던 「인지」를 수집, 보관, 전시해 오고 있다. 취미로써 어린 시절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마니아, 이른바 광(狂)이 되었다.

인지(印紙)라 하면 독자들은 다 이실 것이다. 책 뒷면 판권이 인쇄된 상단에 책을 쓴 이의 인장(印章)을 찍은 우표 크기 정도의 종이를 가리킨다. 종이 바탕면에는 그 출판사 나름대로 디자인된 것으로서 아주 재미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신라와당 가운데 절반 깨어진 기와 여인상이 있는가 하면 조선 백자병의 모습도 있다. 그런가 하면 독립문의 그림도 있다. 전통문양의 떡살, 길상문, 삼신산, 세잎크로바, 생선 등 갖가지 그림이 눈길을 끈다.

이런 모습들은 그 시대 생활의 풍속도이고 그 당시 디자인의 표정이다. 작고 앙증스럽지만 그 위에 얹힌 저자의 붉은 인주를 묻혀 찍은 인장은 위엄도 있다. 인장은 또한 그 작가의 개성에 따라 서각가나 전각가에게 의뢰하여 새긴 것이라서 이채롭다.

새긴 이의 개성이나 아취의 깊이에 따라서 새긴 표정을 흔히 그들 말대로 「갈맛」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수도권 지하철 입구나 법원, 검찰청 입구 도장방에 가면 인장 새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한결같은 기계로 자동, 5분 내지 10분 안에 새긴다. 이런 인장에는 칼맛은 커녕 예술미를 찾을 수 없다.

더러 예술적 취미를 가꾸는 전통수법의 인장 명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숨은 그림처럼 찾기란 쉽지 않다. 인장을 새겨 생계를 꾸려갈 형편이 안 되니 장인이 탄생하기도 어렵다. 이런 전통전각가들을 전수시키기 위한 인장문화재를 좀 더 확대하면 좋은 글씨, 좋은 디자인도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슬며시 판권소유 저자 인장이 생력된 채, 이런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저자와의 협약에 의해 인지를 생략함>

필자와 같이 인지를 수집, 연구하는 연구자에게는 절벽을 만난 듯 한 기분이다. 작업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라지만 이는 핑계로만 들린다. 공을 들여 만든 책 뒷면에 근엄하고 선명한 인주로 찍힌 붉은 도장……. 그것은 작가의 피와 땀이 스민 상징물이다.

이런 예술적이고 고담한 인장의 모습도 아름답고 기발한 디자인의 모습도 책 뒤에 찾을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미술서적이나 기타 예술 책만이라도 옛날처럼 인지를 붙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인지와 인장은 그 나라 출판문화의 꽃이며 출판의 아이콘이다. 세상에 상표 없는 상품은 없다. 저자와 출판사의 상표 인지를 복원하는 운동이 확산되기를 기원해 본다. 그리고 책다운 책에는 이런 귀한 표식도 하나의 장정이다.

책을 쓴 사람과 책을 만든 이의 신성한 약속이 인지 속에 살아 있다. 30년대 이태준의 복덕방 창작집 뒤에 찍힌 금강산 삼봉이 어느 화가의 것인지도 모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재인
소설가

전 경기대교수
충남문학관 관장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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