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충남문학관 관장 / 작가

[뉴스포스트 전문가칼럼=이재인] 지금 중부지방에 가면 더러 펼쳐진 보리밭 풍경이 볼만하다. 특히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한테는 이 보리밭 풍경이 두 가지 추억으로 떠오르게 된다. 보릿고개를 직접 체험한 세대한테는 배고픔과 가난한 날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때 즈음에는 몇몇 마을 부잣집을 빼놓곤 장리쌀을 얻어다가 쌀 몇 줌을 솥에 넣고는 겨우살이로 준비했던 시래기로 죽을 쑤었다. 죽이 멀건하니 뱃구레가 꺼져 노동일을 하려면 허기가 졌다. 여유 있는 집을 제외하곤 냉수로 배를 채웠다.
이때의 가난은 지금처럼 상대적 빈곤감이 없었다. 모두가 가난했고 모두가 힘겨운 세월이었다. 일제에서 해방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 남침으로 전쟁을 겪고 난 필자 세대는 이런 늦 봄날에는 산나물을 캐는 것이 매일의 주된 일이었다.

산나물을 캐다가 나물죽을 끊였다. 된장 몇 숟갈을 풀어 설설 끊이는데 햇보리 몇 주먹도 으레 넣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건강식이었다. 갯기름 나물, 고비, 고사리, 곤달비, 곰취, 까치수염, 꿀풀, 다래, 마, 미역취, 짚신나물, 오갈피 등 이런 산나물, 들나물이 보리가 익을 무렵에 죽을 끓이는 솥의 단골 메뉴였다.
이와 같은 약초 생약 잎을 먹다보니 근력도 생기고 살갗도 땡땡해지지 않았나 싶다. 이런 구황식물을 먹고 자란 우리 세대는 지게에 흙을 져 나르고 돌덩이를 옮겨 제방을 만들어 농토를 넓혀 이 땅을 옥토로 만들었다.

청록색물결을 수놓은 보리밭에 어른들이 너나없이 푸세식 변소에서 인분을 발효시켜 보리밭에 거름을 주었다. 이 거름을 먹고 자란 푸른 보리가 노릇노릇 익어갈 즈음에는 뒷산, 앞산 뻐꾸기, 솟작새(소쩍새의 방언) 소리도 구성졌다.
무슨 음악이 있었던가? 가난이 훈장이던 시절 보리밭 풍경은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도 추억이 아닌가 싶다. 시골에 일가친척을 두게 되어 어쩌다 한 두번 다녀온 그들한테 보리밭 끝에 하얗게 핀 아카시아 흰 꽃과 더불어 낭만적인 풍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보리밭 풍경을 두고 세대와 세대가 느끼는 공감대는 판이하게 다르다. 세상의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것도 확연히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는 역사에서 가장 풍족한 의식주를 누리고 있다. 지난 날 가난과 궁핍이 없이 오늘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질고와 병고, 가난과 굴종과 탄압에 휘말리면서 이룩한 결과가 오늘이다. 얼마 전 6.25를 상기하면서 종교단체에서 주먹밥을 제공하는 행사를 했다. 좋은 의미를 지닌 역사성과 현재성을 중시한 보람 있는 취지로 장년 세대의 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그 주먹밥이 보리를 섞었다거나 산채나 물을 버무렸다면 그게 건강식임이 틀림이 없다. 손기정 선수가 일제하 보리밥에 산나물과 들나물로 주식을 했다는 사실도 자랑스럽다. 나는 오늘 보리가 익어가는 들판에 서서 서정주의 [문둥이] 라는 시를 읊조린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이처럼 보리밭의 풍경은 싱그럽기도 하지만 아픈 기억의 지문처럼 우리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보릿고개 얼마나 힘들었으면 고개라 했던가?

이재인
소설가
전 경기대교수
충남문학관 관장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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